Ep 05. 두 눈금 전환, 더 많이 얻고도 허탈한 협상을 끝내는 법

더 많이 얻은 사람이 더 불행해지는 협상이 있습니다. 같은 집을 같은 날 계약했는데, 더 싸게 얻은 쪽이 밤새 뒤척이고 더 비싸게 얻은 쪽이 개운하게 잠드는 일. 숫자가 아니라 눈금의 문제입니다.

국현우 씨의 지갑 속에는 접힌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맨 위에 적힌 숫자는 3억 9천, 그 아래 작게 적힌 숫자는 4억 2천. 이사 갈 아파트의 전세 보증금을 두고 그가 전날 밤 정리한 두 개의 선이었죠.

이 글의 학습 목표

Ep 04에서 기대치를 높게 세우는 법을 다뤘다면, 이번 회차는 그 높은 목표가 남기는 그림자를 다루며 앞 회차를 보완합니다. 읽고 나면 협상 중에 바라볼 숫자와 협상 뒤에 바라볼 숫자가 왜 달라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고, 목표가 무리한 승부수로 바뀌는 순간을 미리 막을 수 있습니다.

목표를 지키려다 집을 놓칠 뻔한 통화

공인중개사 사무소의 작은 테이블. 집주인 석미란 씨는 지방에 있어서 스피커폰으로 통화에 참여했습니다. 매물 가격은 4억 2천. 국현우 씨는 메모지 맨 위의 숫자부터 꺼냈습니다.

국현우 같은 단지 최근 계약들을 보고 왔는데, 3억 9천이면 오늘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석미란 그건 너무 내려간 것 같고요. 4억 1천까지는 맞춰드릴게요.

국현우 그럼 4억에서 정리하시죠.

석미란 4억이면 도배까지는 제가 해드릴게요.

국현우 아니요, 3억 9천 아니면 저도 어렵습니다.

석미란 …그럼 다음 주에 집 보러 오시는 분이랑 얘기해볼게요.

스피커 너머로 몇 초간 침묵이 흘렀습니다. 중개사가 서둘러 끼어들었고, 결국 계약은 4억에 도배 포함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매물가보다 2천만 원 낮고, 마지노선보다도 2천만 원 낮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소를 나서는 국현우 씨의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지갑 속 메모지의 맨 윗줄, 3억 9천에 1천만 원이 모자랐으니까요. 그날 저녁 그는 계약을 너무 서둘렀다고 자책했고, 그 찜찜함은 입주 날 집주인에게 건넨 인사까지 딱딱하게 만들었습니다.

"목표는 높게, 그리고 끝까지 밀어붙여라"

협상 조언에서 가장 흔한 두 문장입니다. 첫 번째는 맞습니다. 국현우 씨는 높은 목표 덕분에 매물가보다 2천만 원을 아꼈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문장이었습니다. 목표를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두 가지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는 협상 도중에, 하나는 협상이 끝난 뒤에.

한 개의 눈금으로 두 가지를 재려고 할 때

국현우 씨는 협상 내내 메모지의 윗줄 하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한 개의 눈금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맡고 있었죠.

협상 도중에 그 눈금은 기준점이 됐습니다. 3억 9천을 기준으로 보면 4억 도배 포함은 '1천만 원 손해'입니다. 손해 구간에 들어선 사람은 그 손해를 만회하려고 더 큰 위험을 감수하기 쉽습니다. "3억 9천 아니면 어렵다"는 최후통첩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매물가보다 2천만 원 싼 조건을 앞에 두고, 집 자체를 걸어버린 거죠.

협상이 끝난 뒤에는 같은 눈금이 성적표가 됐습니다. 목표에 비하면 실패, 그래서 자책. 결과는 좋았는데 평가는 나빴습니다.

목표 가격과 유보 가격

목표 가격(target price)은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결과이고, 유보 가격(reservation price)은 이 아래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마지노선입니다. 국현우 씨에게는 3억 9천이 목표, 4억 2천이 유보 가격이었습니다. 이 회차의 핵심은 두 숫자 중 무엇을 '언제' 바라보느냐입니다.

더 많이 얻은 쪽이 덜 만족했다는 실험

Galinsky, Mussweiler, Medvec은 2002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세 개의 실험에서, 협상자가 어떤 숫자에 초점을 두느냐가 결과와 만족을 어떻게 갈라놓는지 살폈습니다.

목표 가격에 초점을 둔 협상자는 마지노선에 초점을 둔 협상자보다 객관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그 결과에 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실험에서 목표에 집중했던 협상자에게 협상이 끝난 뒤 마지노선을 다시 떠올리게 하자 만족도가 올라가, 평가가 실제 결과에 맞춰졌습니다.

국현우 씨가 사무소를 나서며 느낀 감정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연구는 해법의 단서도 함께 줍니다. 목표를 낮출 필요는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금을 협상이 끝난 뒤에 바꾸면 됩니다.

협상 도중의 위험도 연구로 확인됐습니다. Larrick, Heath, Wu는 2009년 Social Cognition에 실린 세 개의 실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조건과 '구체적이고 도전적인 목표'를 준 조건을 비교했습니다. 목표가 있는 조건에서는 협상과 의사결정 과제 모두에서 위험한 선택이 일관되게 늘었습니다. 연구진은 목표가 기준점 역할을 하면서 그 아래 결과를 손실처럼 느끼게 만들고, 손실 앞에서 사람은 더 위험을 감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준거점과 손실 영역

사람은 결과를 절대 금액보다 어떤 기준점과 비교해 이득인지 손실인지로 판단합니다. 이 기준점을 준거점이라 하고, 그 아래를 손실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목표 가격이 준거점이 되면, 마지노선보다 한참 좋은 결과도 손실 영역에 놓여 버립니다.

두 눈금 전환,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른 숫자를 본다

이 채널은 이 방법을 '두 눈금 전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메모지에 숫자 두 개를 적는 것까지는 국현우 씨도 했습니다. 빠진 건 그 두 눈금을 언제 바꿔 볼지에 대한 규칙이었습니다.

들어갈 때는 목표 눈금을 봅니다. 첫 숫자와 처음 몇 번의 주고받기는 윗줄을 기준으로 정합니다. 여기까지는 Ep 04의 가상 출구 리허설과 같은 방향입니다.

마지막 결정 직전에는 바닥 눈금을 꺼냅니다. 최후통첩이나 결렬을 입에 올리고 싶어지는 순간, 메모지의 아랫줄을 확인합니다. 지금 테이블 위의 조건이 마지노선보다 얼마나 유리한지. 그 거리가 크다면 남은 차이를 위해 거래 전체를 거는 건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나올 때는 바닥 눈금으로 평가합니다. 협상이 끝나면 '목표에 얼마나 못 미쳤나'가 아니라 '마지노선보다 얼마나 유리한 자리에서 끝냈나'를 먼저 적습니다. 목표와의 차이는 다음 협상의 준비 자료로 따로 기록합니다.

"4억이면 저도 많이 맞춘 거라, 도배 포함으로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그 조건이면 진행하겠습니다. 입주일만 하루 당겨주실 수 있을까요?"

"좋은 조건 맞춰주셔서 감사합니다. 2년 동안 잘 지내겠습니다."

첫 문장은 바닥 눈금을 확인한 뒤 최후통첩 대신 마무리를 고르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남은 차이를 돈이 아니라 작은 조건 하나로 바꿔 받는 말이고, 세 번째는 끝난 협상을 관계의 시작으로 넘기는 말입니다.

같은 테이블, 눈금을 바꿔 든 순간

이번에는 집주인 쪽에서 덤 하나를 먼저 얹었습니다.

석미란 4억이면 도배까지는 제가 해드릴게요.

국현우 그 조건이면 진행하겠습니다. 이삿날이 금요일이라 입주를 하루만 당겨주실 수 있을까요?

석미란 그 정도야 괜찮죠. 깔끔하게 하셔서 좋네요. 보일러도 이번에 점검받아 놓을게요.

숫자는 같았지만 테이블에 오른 조건은 늘었습니다. 최후통첩이 빠진 자리에 입주일 조정이 들어갔고, 집주인은 요청받지 않은 보일러 점검까지 스스로 꺼냈습니다. 그리고 국현우 씨는 메모지의 아랫줄을 보며 사무소를 나섰습니다. 마지노선보다 2천만 원 유리한 조건, 거기에 도배와 하루 빠른 입주까지.

목표 눈금 하나로 끝까지 갔을 때

목표에 못 미친 1천만 원을 손실로 느껴 최후통첩을 던졌고, 집을 놓칠 뻔했습니다. 4억 도배 포함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고도 자책했고, 그 감정이 집주인과의 첫 관계까지 굳게 만들었습니다.

결정 직전 눈금을 바꿨을 때

같은 보증금에 입주일 조정과 보일러 점검이 더해졌습니다. 결렬 위험 없이 협상이 닫혔고, 마지노선보다 2천만 원 유리하다는 평가 덕분에 계약 뒤의 관계도 부드럽게 시작됐습니다.

집주인, 상사, 단골 거래처 앞에서 눈금이 하는 일

집주인처럼 계약 뒤에도 2년을 엮이는 상대라면, 나올 때의 평가 눈금이 특히 중요합니다. 협상 결과에 대한 내 감정이 이후 관계의 온도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상사와의 연봉이나 업무 조건 협상이라면 결정 직전의 바닥 확인이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목표에 못 미친다고 "그럼 저도 생각해보겠습니다" 같은 말을 던지는 순간, 그것은 협상이 아니라 관계를 건 승부가 됩니다.

한 번 보고 마는 거래라면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관계 비용이 작으니 목표 눈금을 조금 더 오래 붙들어도 됩니다. 다만 그때도 결렬을 선언하기 전에 바닥 눈금 한 번은 꺼내 보는 습관이 손해를 막습니다.

두 눈금 전환이 독이 되는 경우

바닥 눈금으로 평가하라는 말을 '마지노선만 넘으면 됐다'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협상 도중에 바닥 눈금을 너무 일찍 꺼내면, 그 순간부터 다시 마지노선 근처로 미끄러집니다. 바닥은 결정 직전과 협상 뒤에만 꺼냅니다.

마지노선 자체가 잘못 그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국현우 씨의 4억 2천이 실제 시세보다 한참 높았다면, 그 선을 기준으로 한 만족은 착각일 뿐입니다. 바닥 눈금은 정확할 때만 평가 도구가 됩니다.

연구의 범위도 짚어둡니다. 두 연구 모두 실험실의 모의 협상과 의사결정 과제를 다뤘습니다. 집처럼 생활 전체가 걸린 협상에서는 감정의 무게가 훨씬 커서, 눈금을 바꾸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메모지에 숫자를 적고 그 아래에 '결정 직전 아랫줄 확인'이라는 한 줄을 함께 적어두는 식의 물리적 장치가 도움이 됩니다.

목표는 협상을 끌어올리는 눈금이고, 마지노선은 협상을 평가하는 눈금입니다. 하나의 숫자로 두 일을 시키면 둘 다 망가집니다.

이제 국현우 씨의 메모지에는 숫자가 두 개, 그리고 그 숫자를 바꿔 볼 시점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숫자를 세우는 첫 국면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국면에서는 그 숫자가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다룹니다. 그런데 같은 목표라도 "3억 9천이요"라고 말할 때와 "3억 8,750이요"라고 말할 때, 상대의 귀에는 정말 같은 숫자로 들릴까요?

참고 자료

  • Galinsky, A. D., Mussweiler, T., and Medvec, V. H. (2002). Disconnecting outcomes and evaluations: The role of negotiator focu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131–1140 — 원문 정보
  • Larrick, R. P., Heath, C., and Wu, G. (2009). Goal-induced risk taking in negotiation and decision making. Social Cognition, 27(3), 342–364 — 원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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