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문이 열리기 전에 이미 의제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올해 단가를 얼마나 내릴 것인가. 올릴 것인가는 처음부터 질문에 없었습니다.
포장재 제작업체 영업팀장 마동훈 씨는 7년째 같은 원청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매출의 절반 가까이가 이 한 곳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원청 구매팀의 차승민 과장은 그 사실을 마동훈 씨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Ep 03에서 맞은편 지도를 그렸더니 상대의 대안이 훨씬 넓고 내 쪽이 절박하다면, 이번 회차는 그 기울어진 테이블을 정면으로 다루며 앞 회차를 심화합니다. 읽고 나면 힘이 약한 쪽이 왜 먼저 입을 떼지 못하는지 설명할 수 있고, 실제 대안 없이도 기대치를 끌어올려 첫 마디를 먼저 꺼내는 준비 과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먼저 입을 연 쪽이 의제를 가져갔다
마동훈 씨에게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지난 1년 사이 골판지 원지 가격이 크게 올랐고, 인건비도 올랐습니다. 그는 원가 자료를 출력해 파일철에 넣어 왔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그 파일철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차승민 과장 올해 전사 원가 절감 목표가 있어서요. 협력사 단가는 5% 인하로 가려고 합니다.
마동훈 팀장 아… 저희도 원자재가 좀 올라서 사정이 쉽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차승민 과장 어렵다는 건 알죠. 그럼 3%로 하시죠. 저희도 많이 양보한 겁니다.
마동훈 팀장 …네, 감사합니다.
원가는 올랐는데 단가는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동훈 씨는 회의실을 나오며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5%를 3%로 줄였으니까요. 원가 상승분을 반영해 단가를 올려야 했던 협상이, 인하 폭을 줄인 것에 감사하는 협상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을은 상대가 꺼내는 걸 기다리는 게 예의"라는 습관
힘이 약한 쪽은 대개 이렇게 배웁니다. 먼저 요구하면 건방져 보인다, 상대가 조건을 내놓으면 그 안에서 최선을 찾아라, 관계를 지키는 게 단가보다 중요하다.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잃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쪽은 숫자만 내주는 게 아니라, 무엇을 놓고 협상할지를 정하는 권리까지 내줍니다.
기다리는 쪽은 숫자보다 먼저 질문을 빼앗긴다
이 장면을 대화의 구조로 보면 세 가지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처음은 의제 선점입니다. 차승민 과장의 첫 문장이 이 회의의 질문을 '얼마나 내릴까'로 고정했습니다. 그 질문 안에서는 아무리 잘 싸워도 결과는 인하입니다. 마동훈 씨의 원가 자료는 이 질문에 답하는 자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파일철 밖으로 나올 자리가 없었죠.
다음은 기대치의 하향 고정입니다. 마동훈 씨는 들어가기 전부터 '이번에도 내리라고 하겠지'를 예상했고, 그 예상이 곧 목표가 됐습니다. 동결만 해도 선방, 인하 폭을 줄이면 성공. 이 기준이라면 3% 인하는 승리처럼 느껴집니다.
마지막은 양보의 착시입니다. 5%에서 3%로 물러선 것은 상대가 처음 던진 숫자를 기준으로 할 때만 양보입니다. 원가를 기준으로 하면 마동훈 씨 쪽이 계속 내준 것이죠. 먼저 숫자를 던진 쪽이 무엇을 '양보'로 부를지까지 정한 겁니다.
열망 수준 (aspiration)
협상에 들어가며 '이 정도는 얻고 싶다'고 마음속에 세운 목표 수준입니다. 마지노선이 '이 아래면 떠난다'는 바닥이라면, 열망 수준은 '여기까지 노린다'는 천장에 가깝습니다. 첫 제안의 크기는 대개 이 천장의 높이를 따라갑니다.
힘이 약한 사람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다
Magee, Galinsky, Gruenfeld는 2007년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에 실린 다섯 개의 실험에서 힘이 경쟁적인 상황의 첫 움직임을 어떻게 바꾸는지 살폈습니다.
힘이 큰 사람은 힘이 작은 사람보다 협상을 먼저 시작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강한 대안을 가진 협상자는 대안이 없는 협상자보다 첫 제안을 하겠다고 스스로 말하는 비율이 세 배를 넘었고, 실제로 첫 제안을 한 쪽이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마동훈 씨가 파일철을 열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힘의 차이는 단지 결과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누가 먼저 입을 여느냐부터 기울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대안이 없는 쪽은 방법이 없을까요. Schaerer, Schweinsberg, Swaab가 2018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는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다섯 개의 연구에서, 강한 대안을 머릿속으로 구체적으로 그려보도록 한 협상자는 더 야심 차게 협상하고 더 유리한 합의를 얻었습니다. 이 효과는 기대치를 끌어올려 첫 제안을 더 과감하게 만드는 경로로 나타났고, 상상한 대안이 매력적일 때만 생겼습니다. 다만 양측 입장 차이가 커서 합의할 여지가 좁은 협상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습니다.
정신적 시뮬레이션 (mental simulation)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그려보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손에 쥔 것은 같아도, 더 나은 선택지를 생생하게 떠올린 사람은 자기 목표를 다르게 세웁니다. 느끼는 힘과 실제 힘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꾸로 활용하는 셈입니다.
가상 출구 리허설, 없는 문을 상상하고 먼저 입을 여는 법
이 채널은 이 준비 과정을 '가상 출구 리허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Ep 01의 바닥 가리기가 이미 가진 약한 대안을 시야에서 치우는 일이었다면, 가상 출구 리허설은 아예 없는 출구를 머릿속에 세워 기대치의 천장을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두 단계입니다.
첫 단계는 리허설입니다. 회의 전날 밤 10분, 매력적인 다른 거래처와 계약한 장면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써봅니다. 지난달 문의가 왔던 업체, 그 업체의 물량, 그 계약이 성사됐을 때 회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핵심은 '그럴듯한 가정'이 아니라 '매력적인 장면'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연구에서도 효과는 상상한 대안이 매력적일 때만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선발화입니다. 그 장면에서 세운 기대치로 회의의 첫 문장을 내가 엽니다. 상대가 의제를 정하기 전에, 무엇을 놓고 이야기할지를 먼저 테이블에 올리는 거죠.
"단가 말씀 나누기 전에, 지난 1년 원가 변동부터 먼저 공유드려도 될까요?"
"원지 가격이 이만큼 움직여서, 저희는 올해 3% 조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단가가 어렵다면, 결제 조건이나 물량 쪽에서 같이 방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이 문장들에는 상상한 거래처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등장해서도 안 됩니다. 가상 출구는 내 기대치를 세우는 데에만 쓰고, 상대에게는 실제 원가라는 사실만 내놓습니다. 상상을 사실처럼 말하는 순간 그것은 협상 기술이 아니라 거짓말이 되고, 7년의 관계도 함께 무너집니다.
같은 회의실, 다른 첫 문장
이번 회의에서 의제를 정한 사람은 차승민 과장이 아니라 마동훈 씨였습니다.
마동훈 팀장 단가 말씀 나누기 전에, 지난 1년 원가 변동부터 먼저 공유드려도 될까요? 원지 가격이 이만큼 올라서, 저희는 3% 조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차승민 과장 음… 원가가 이렇게 움직였군요. 그런데 저희도 전사 절감 목표가 있어서 인상은 정말 어렵습니다.
마동훈 팀장 그럼 단가는 동결하고, 대금 결제 기간을 60일에서 45일로 줄여주시는 건 어떨까요? 저희 쪽 자금 부담이 그만큼 줄어서요.
차승민 과장 결제 기간은 제가 내부에 올려볼 수 있겠네요. 동결로 정리하죠.
5% 인하라는 숫자는 회의 끝까지 한 번도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마동훈 씨가 먼저 꺼낸 원가가 회의의 질문을 '얼마나 내릴까'에서 '어떻게 부담을 나눌까'로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첫 문장을 기다렸을 때
회의의 질문이 '인하 폭'으로 고정됐고, 원가 자료는 꺼낼 자리를 잃었습니다. 3% 인하가 양보처럼 포장되어 합의됐고, 마동훈 씨는 손해를 보면서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리허설 후 먼저 입을 열었을 때
인하 요구가 나오기 전에 원가가 의제가 됐고, 결과는 단가 동결에 결제 기간 단축까지 더해졌습니다. 힘의 차이는 그대로였지만, 그 차이가 결과를 정하는 폭은 크게 줄었습니다.
원청 앞, 상사 앞, 대형 플랫폼 앞
원청과 하청 사이라면 먼저 꺼내는 의제는 감정이 아니라 숫자여야 합니다. 원가, 물량, 납기처럼 상대 조직도 내부에 보고할 수 있는 언어로 시작해야 상대가 그 의제를 받아들일 명분이 생깁니다.
상사와의 협상에서는 선발화의 형태가 조금 달라집니다. 회의실에서 갑자기 꺼내기보다 "다음 주 면담 때 업무 배분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처럼 의제를 미리 예고하는 편이 위계를 덜 건드리면서도 테이블의 주제를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대형 플랫폼이나 프랜차이즈 본사처럼 조건이 일괄 공지되는 상대라면, 개인이 의제를 바꾸기 어렵습니다. 이때 가상 출구 리허설은 협상 테이블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판단하는 데 더 쓸모가 있습니다. 매력적인 대안을 그려본 뒤에도 이 조건이 낫다면 받아들이고, 아니라면 실제 대안을 만드는 쪽으로 움직이는 거죠.
상상한 출구가 막다른 길이 되는 순간
2018년 연구가 분명히 경고한 지점이 있습니다. 양측 입장 차이가 처음부터 커서 합의할 여지가 좁은 협상이라면, 상상으로 높아진 기대치는 오히려 결렬을 부릅니다. 원청이 이미 다른 협력사와 계약을 마무리하는 중이라면, 높아진 천장은 버틸 근거가 아니라 문을 닫는 이유가 됩니다.
상상은 상상으로만 둬야 합니다. 리허설에서 그린 거래처를 회의실에서 "다른 데서도 연락이 왔다"는 식으로 흘리는 순간, 그건 상대를 속이는 일입니다. 확인되면 이번 협상뿐 아니라 이후의 모든 협상에서 내 말의 무게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다는 것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동훈 씨의 첫 문장이 통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 원가라는 확인 가능한 근거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이 약하다는 건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문을 남이 정하게 둔다는 뜻일 때가 더 많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마동훈 씨의 파일철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채 남아 있었습니다. 차승민 과장이 나간 회의실에는 원가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 한 장만 조용히 놓여 있었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남습니다. 기대치를 높게 세우고 들어가 실제로 더 많이 얻었는데도, 협상이 끝나고 나면 처음 그렸던 목표에 못 미쳤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허탈해질 수 있습니다. 높은 목표가 결과를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만족을 깎는다면, 우리는 협상 내내 어떤 숫자를 바라보고 있어야 할까요?
참고 자료
- Magee, J. C., Galinsky, A. D., and Gruenfeld, D. H. (2007). Power, propensity to negotiate, and moving first in competitive interaction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 원문 정보
- Schaerer, M., Schweinsberg, M., and Swaab, R. I. (2018). Imaginary alternatives: The impact of mental simulation on powerless negotiator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15(1), 96–117 — 원문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