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3. 맞은편 지도 그리기, 상대의 대안을 짐작하는 순간 단가는 무너진다

상대를 배려할수록 협상을 망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상대의 사정을 짐작만 하고 묻지 않을 때입니다. 그 짐작은 대개 상대의 현실이 아니라 내 불안을 그대로 비춘 거울이기 때문이죠.

이번 회차는 순서를 바꿔 기법부터 꺼내겠습니다. 이름은 '맞은편 지도 그리기'. 숫자를 부르기 전에, 이 협상이 깨지면 상대가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지도처럼 먼저 그려보는 방법입니다. 이 지도가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래 장면이 보여줍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Ep 01과 Ep 02가 내 쪽의 대안과 감정을 정리했다면, 이번 회차는 시선을 테이블 맞은편으로 옮겨 앞선 두 회차를 보완합니다. 읽고 나면 상대의 대안을 내 기준으로 짐작할 때 생기는 오류를 설명할 수 있고, 몇 개의 질문으로 상대의 실제 선택지를 확인하는 순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유리벽 미팅룸에서 그려지지 않은 지도

공유오피스 3층, 네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유리벽 미팅룸. 화이트보드에는 앞 팀이 지우다 만 일정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창밖으로는 같은 층 스타트업 직원들이 노트북을 들고 바쁘게 오갔습니다.

프리랜서 영상 편집자 공민서 씨는 이 회사의 마케팅 매니저 연하준 씨와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신제품 홍보용 짧은 영상 열 편. 평소 그녀의 단가는 편당 80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미팅룸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프리랜서 플랫폼에서 매일 보는 편당 30만 원짜리 견적들. 벽 너머로 보이는 앳된 직원들과 중고 사무 가구. '여긴 예산이 빠듯하겠구나.'

연하준 매니저 사실 다른 분들 견적도 몇 개 받아보고 있어서요. 편당 얼마 정도 생각하세요?

공민서 아직 초기 회사시니까… 편당 50만 원에 맞춰드릴게요.

연하준 매니저 감사합니다. 그럼 첫 다섯 편은 2주 안에 받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평소 단가보다 30만 원을 낮췄고, 거기에 2주라는 빠듯한 일정까지 덤으로 받아 안았습니다.

한 달 뒤, 작업 중에 오간 메시지에서 사정이 드러났습니다. 이 회사는 원래 대행사에 편당 150만 원을 주고 영상을 맡겼는데, 그 대행사가 계약을 갑자기 끝냈습니다. 신제품 출시는 3주 뒤로 잡혀 있었고, 사내에는 편집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견적"은 일정을 맞출 수 없다는 답만 돌아온 상태였죠.

"상대 사정을 헤아려 맞춰주는 게 프로"라는 믿음

공민서 씨의 선택은 나쁜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흔히 칭찬받는 태도였죠. 고객의 상황을 헤아리고, 먼저 맞춰주고, 다음 일을 기약하는 것.

문제는 그녀가 헤아린 '상대 사정'이 실제로는 한 번도 확인된 적 없는 그림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과 상대의 사정을 지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상대의 대안을 내 화면으로 추정했을 때

이 장면에서 대화를 기울인 오류는 두 겹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중심적 추정입니다. 공민서 씨가 떠올린 '편당 30만 원짜리 경쟁자들'은 그녀가 일감을 찾을 때 보는 화면이었습니다. 고객이 영상을 맡길 곳을 찾을 때 보는 화면이 아니었죠. 고객의 화면에는 일정, 브랜드 톤, 기존 작업과의 연속성, 그리고 교체 비용이 함께 떠 있습니다. 그녀는 상대의 대안 목록을 자기 쪽 정보로 채운 겁니다.

두 번째는 감정 이입의 방향 착오입니다. '예산이 빠듯하겠다'는 마음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상대를 안쓰러워하는 감정에 가까웠습니다. 그 감정이 그녀의 숫자를 곧장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견적도 받아보고 있다"는 한마디는 이 두 오류 위에 얹혔습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는 문장이 확인된 사실처럼 작동한 거죠.

자기중심적 기준점과 조정

Epley, Keysar, Van Boven, Gilovich가 2004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의 제목이기도 한 개념입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짐작할 때 사람은 자기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고 거기서 조정해 나간다는 설명입니다. Ep 01에서 다룬 기준점 효과가 숫자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은 상대의 처지를 짐작하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상대를 느끼는 사람보다 상대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얻었다

Galinsky, Maddux, Gilin, White는 2008년 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연구에서 비슷해 보이는 두 능력을 구분해 협상에 미치는 효과를 비교했습니다. 하나는 상대의 관점을 머리로 이해하는 관점 수용, 다른 하나는 상대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공감입니다.

세 개의 연구에서 관점 수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합의 지점을 찾고, 함께 얻을 가치를 키우면서 자기 몫도 챙기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반면 공감은 그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고, 때로는 합의를 찾는 능력과 개인의 이익을 오히려 떨어뜨렸습니다. 이 결과는 뻔한 타협점이 없는 협상과 여러 조건을 주고받아야 하는 협상 모두에서 나타났습니다.

공민서 씨에게 부족했던 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은 넘쳤습니다. 부족했던 건 상대가 지금 어떤 선택지를 손에 쥐고 있는지를 차갑게 따져보는 생각이었습니다.

관점 수용과 공감

관점 수용(perspective taking)은 '상대라면 지금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고, 공감(empathy)은 상대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능력입니다. 일상에서는 둘 다 소중하지만, 협상에서는 앞의 것이 정보를 만들고 뒤의 것은 때로 양보를 만듭니다.

맞은편 지도 그리기, 세 칸만 채우면 된다

맞은편 지도는 거창한 시장 조사가 아닙니다. 상대 입장에서 세 칸을 채우는 작업입니다.

첫 칸은 이 협상이 깨지면 상대가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방식, 아니면 아예 하지 않는 선택까지. 둘째 칸은 그곳으로 갈 때 상대가 치르는 비용입니다. 돈만이 아니라 시간, 다시 설명하는 수고, 결과물의 불확실성까지 포함합니다. 셋째 칸은 상대의 시계입니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는지가 대안의 실제 무게를 정합니다.

빈칸은 짐작으로 채우지 않습니다. 질문으로 채웁니다. 상대가 이미 쓴 방법, 정해진 일정, 내부 사정을 묻는 질문은 캐묻는 게 아니라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확인으로 들립니다.

"그동안 영상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오셨어요?"

"출시 일정은 언제로 잡혀 있나요? 그 날짜에서 거꾸로 일정을 짜보려고요."

"수정 요청은 내부에서 누가 확인하시나요? 편집 쪽을 직접 보실 분이 계신지 궁금해서요."

첫 질문은 지도의 첫 칸, 두 번째 질문은 셋째 칸, 세 번째 질문은 상대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셋 모두 내 가격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처한 상황을 테이블 위로 꺼내 놓습니다.

같은 미팅룸, 세 개의 질문 뒤

질문 세 개가 끝났을 때, 연하준 씨는 "다른 견적"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공민서 그동안 영상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오셨어요?

연하준 매니저 대행사에 맡겼는데 지난달에 계약이 끝났어요. 출시가 3주 뒤라 좀 급한 상황이고요.

공민서 그럼 2주 안에 첫 다섯 편이 나와야겠네요. 기존 영상 톤을 이어가는 조건으로 편당 85만 원 생각했습니다.

연하준 매니저 대행사보다는 훨씬 낫네요. 75만 원까지 맞춰주실 수 있을까요?

공민서 열 편 일괄 계약이면 80만 원에 하겠습니다.

연하준 씨가 비교 대상으로 꺼낸 건 플랫폼의 30만 원 견적이 아니라 이전 대행사였습니다. 상대가 실제로 서 있는 자리를 알게 되자, 공민서 씨의 숫자는 그 자리를 기준으로 정해졌습니다.

짐작으로 지도를 채웠을 때

상대의 비교 대상이 플랫폼 최저가로 설정됐고, 단가는 평소보다 30만 원 낮은 50만 원에 정해졌습니다. 상대가 가장 급하게 원하던 빠른 일정은 추가 비용 없이 따라붙었습니다.

질문으로 지도를 채웠을 때

상대 스스로 이전 대행사를 비교 대상으로 꺼냈고, 80만 원이 '훨씬 나은 가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급한 일정은 공짜 덤이 아니라 가격을 정당화하는 조건이 되었고, 열 편 일괄 계약까지 확정됐습니다.

거래처, 상사, 가족의 지도는 모양이 다르다

거래처라면 지도의 칸이 대부분 업무 정보라서 질문하기도 쉽습니다. 이전 방식, 일정, 담당자를 묻는 건 일을 맡을 사람의 당연한 확인이니까요.

상사와의 협상에서는 상대의 대안이 대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입니다. 이때는 "이 일, 팀에서 다른 분이 맡을 수 있는 구조인가요?"처럼 직접 묻기보다 "이 일정이면 팀 내 다른 작업과 겹치는 부분은 없을까요?"처럼 업무 배치를 함께 고민하는 질문으로 같은 정보를 얻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가족 사이에서는 '대안'이라는 말 자체가 차갑게 들립니다. "이거 안 되면 어떻게 할 건데?"는 협박처럼 들릴 수 있죠. 그래서 가족에게는 상대가 다른 선택을 할 때 무엇이 걱정되는지를 묻는 쪽이 같은 지도를 더 부드럽게 채웁니다.

지도가 오히려 길을 잃게 만드는 경우

질문이 많아지면 확인이 아니라 심문이 됩니다. 상대가 아직 나를 신뢰하지 않는 첫 미팅이라면, 질문은 두세 개로 충분합니다. 나머지 칸은 일을 하면서 채워도 늦지 않습니다.

지도를 그렸는데 상대의 대안이 정말 많고 저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맞은편 지도는 내 숫자를 높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이 거래가 내게 맞는지, 조건을 바꿔야 하는지를 일찍 알려줍니다. 그것도 지도의 쓸모입니다.

연구의 한계도 있습니다. 2008년 연구는 관점 수용과 공감의 효과를 비교했을 뿐, 상대의 대안을 묻는 특정 질문의 효과를 직접 검증한 것은 아닙니다. 질문 목록은 그 연구 결과 위에서 이 채널이 설계한 적용입니다. 그리고 공감이 쓸모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관계가 오래 이어질 상대라면, 합의 이후의 신뢰를 지키는 데에는 공감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뒤, 미팅룸 화이트보드에는 공민서 씨가 그려둔 작업 일정표가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지우다 만 흔적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그은 날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도가 그녀 편이었습니다. 맞은편 지도를 그렸더니 상대의 대안이 훨씬 넓고, 내 쪽은 이 일 하나 놓치면 다음 달이 막막한 처지라면, 처음부터 기울어진 그 테이블에서 우리는 어떤 첫 마디를 꺼낼 수 있을까요?

참고 자료

  • Galinsky, A. D., Maddux, W. W., Gilin, D., and White, J. B. (2008). Why it pays to get inside the head of your opponent. Psychological Science, 19(4) — 원문 정보
  • Epley, N., Keysar, B., Van Boven, L., and Gilovich, T. (2004). Perspective taking as egocentric anchoring and adjustment.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7(3), 327–339 — 원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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