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본 원리 Ep 014 경첩 전환법, 끊긴 대화를 잇다

대화의 기본 원리  >  흐름 잇기  >  침묵 뒤 화제 건너기  ·  중급

이번 회차 학습 목표: 한 화제가 끝난 직후의 짧은 침묵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이해하고, 앞 화제의 한 단어를 경첩처럼 붙잡아 다음 화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법을 익힙니다. Ep 013까지 "듣기의 기술"로 상대의 말과 이름을 붙잡는 법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새 대분류 "흐름 잇기"의 첫 회차로서 붙잡은 대화가 끊기지 않게 다음으로 건너가는 법으로 나아갑니다.

이번 회차의 한 문장

오늘부터 대화가 끊기는 순간, 새 화제를 허공에 던지지 않고 방금 끝난 화제의 한 단어를 붙잡아 다음 이야기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 모임은 웃음이 터진 직후에 식었습니다.

금요일 밤 8시, 을지로 골목 안쪽 노포의 2층 방. 대학 사진 동아리 동기 세 사람이 반년 만에 모였습니다. 모임을 잡은 사람은 서른일곱 여슬기 씨였습니다. 불판 위 삼겹살이 익어 가는 동안 첫 30분은 순조로웠습니다. 모지환 씨의 이직 소식에 다들 박수를 쳤고, 천경민 씨가 "그 회사 면접에서 넥타이 거꾸로 맸다며?" 하고 놀리자 방 안이 한바탕 웃음으로 뒤집혔습니다.

웃음이 잦아든 4초, 아무 화제나 던진 순간 대화는 더 멀어졌다

한 화제가 끝난 직후의 침묵을 앞 이야기와 아무 상관 없는 새 화제로 메우면, 대화는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처음부터 시작됩니다. 매번 처음부터 시작하는 대화는 금방 지칩니다.

웃음이 잦아들자 방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고기 뒤집는 집게 소리만 들렸습니다. 슬기 씨는 그 몇 초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모임을 잡은 사람으로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여슬기: 근데 다들 요즘 무슨 드라마 봐?

모지환: 드라마? 난 요즘 거의 못 보는데.

천경민: 나도.

여슬기: 아… 그럼 요즘 집값 얘기 들었어? 우리 동네는 또 올랐다던데.

모지환: 음, 그런가 보네.

천경민: (휴대폰을 확인하며) 아, 나 내일 아침 일찍 현장 나가야 해서.

슬기 씨가 던진 화제는 세 개였습니다. 드라마, 집값, 그리고 한 번 더 시도한 연말 계획. 하나같이 두세 마디 만에 꺼졌습니다. 경민 씨는 9시 반쯤 먼저 일어났고, 지환 씨도 곧 따라 나갔습니다. 반년을 기다린 모임이 두 시간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단톡방에 올라온 한 줄, "요즘 우리 만나면 좀 어색하지 않냐"

끊긴 대화가 남기는 것은 그날의 어색함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끊긴 흐름을 "우리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신호로 읽습니다.

다음 날 오후, 동기 단톡방에 경민 씨의 메시지가 올라왔습니다.

천경민: 어제 반가웠다. 근데 요즘 우리 만나면 좀 어색하지 않냐? 대학 땐 밤새 떠들었는데 ㅋㅋ

모지환: 나이 들어서 그런가 ㅋㅋ 할 얘기가 줄었나 봐.

여슬기: …

슬기 씨는 입력창에 "그러게"를 썼다 지웠습니다. 할 얘기가 줄어서였을까요. 슬기 씨가 떠올린 전날 밤은 달랐습니다. 할 얘기는 넘쳤습니다. 지환 씨의 새 회사, 경민 씨가 요즘 다닌다는 현장, 셋이 함께 찍으러 다니던 옛날 출사. 다만 그 이야기들 사이를 건너가는 다리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모임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인데, 근황 한 바퀴가 돌고 나면 이상하게 할 말이 없어지는 자리. 그런데 정말 할 말이 없어서일까요? 네덜란드의 한 연구팀은 이 짧은 침묵이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남기는지부터 확인했습니다.

흐로닝언대 연구팀이 잰 4초, 짧은 침묵이 소속감을 흔들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화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 흐름이 단 몇 초 끊기면,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거절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흐로닝언대의 남키에 쿠덴뷔르흐 연구팀은 2011년, 두 차례의 실험으로 짧은 침묵의 영향을 살폈습니다. 두 번째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세 사람이 대화하는 6분짜리 영상을 보며 그중 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았습니다. 대화 중간에 4초의 침묵이 끼어든 영상을 본 참가자들은, 매끄럽게 이어진 영상을 본 참가자들보다 부정적인 감정과 거절감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정작 참가자들은 그 침묵을 의식하지 못했는데도요.

대화 흐름(conversational flow) — 말이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주고받아지는 대화의 리듬입니다. 쿠덴뷔르흐 연구팀은 이 흐름 자체가 내용과 별개로 소속감과 자존감을 만든다고 봤습니다. 슬기 씨의 모임이 식은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흐름이 여러 번 끊겼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인정(social validation) —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이나 존재를 받아들이고 동의한다고 느끼는 경험입니다. 연구팀은 사람들이 대화가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다들 나와 생각이 같구나"라고 무의식적으로 추론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경민 씨의 "우리 좀 어색하지 않냐"는, 흐름이 끊기며 이 인정의 느낌이 흔들린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슬기 씨의 선택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이 불편하다는 감각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침묵을 메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앞 이야기와 끊어진 새 화제는 침묵을 없애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두세 마디 뒤에 또 하나의 침묵을 만들었습니다.

다 같이 웃는 순간이, 사실은 화제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함께 터진 웃음은 즐거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신호로 자주 쓰입니다. 그러니 웃음 뒤의 침묵은 사고가 아니라 예상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요크대의 엘리자베스 홀트는 2010년, 실제 대화 녹음을 대량으로 분석해 하나의 규칙적인 패턴을 찾아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웃는 순간은 화제가 마무리되는 지점과 자주 겹쳤습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를 더 이어 가고 싶은 사람은 웃음에 끼지 않고 말을 덧붙이며 화제가 닫히는 것을 막기도 했습니다.

대화 분석(conversation analysis) — 실제로 녹음된 일상 대화를 한 마디, 한 숨소리 단위까지 옮겨 적고, 사람들이 대화를 어떤 규칙으로 주고받는지 찾아내는 연구 방법입니다. 실험실이 아니라 진짜 대화에서 나온 패턴이라는 것이 강점입니다. 이번 회차의 화제 전환 개념들은 모두 이 방법에서 나왔습니다.

공유된 웃음(shared laughter) — 한 사람의 웃음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웃으며 응하는 순간입니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 외에, 대화의 한 단락이 매듭지어졌음을 서로 확인하는 역할도 합니다. 넥타이 이야기에 방 안이 뒤집혔던 그 웃음은, 지환 씨의 이직 화제가 막 닫혔다는 표시였습니다.

화제 종결(topic termination) — 대화 참여자들이 함께 한 화제를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과정입니다. 웃음, "그렇지 뭐" 같은 평가, 짧은 요약이 흔한 종결 신호입니다. 종결 신호를 알아채면 침묵이 오기 전에 다음 다리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새 화제로 뛰어드는 사람과 한 단어를 밟고 건너는 사람

대화가 잘 이어지는 사람은 화제를 갈아치우지 않습니다. 앞 이야기의 한 조각을 밟고 옆 이야기로 한 걸음 옮겨 갑니다. 이 한 걸음이 대화를 "끊긴 것"이 아니라 "흘러간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대화 분석의 선구자 게일 제퍼슨은 1984년, 사람들이 무거운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 한 번에 건너뛰지 않고 여러 단계를 거쳐 조금씩 옮겨 간다는 점을 보여 줬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홀트와 폴 드루는 2005년, 그 전환에 쓰이는 흥미로운 장치를 분석했습니다. 앞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비유적 표현이, 앞 이야기와 이어지면서도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문을 여는 "축"이 된다는 겁니다.

단계적 화제 전환(stepwise topic transition) — 앞 화제의 어떤 요소를 이어받아 조금씩 옆 화제로 옮겨 가는 방식입니다. 듣는 사람은 화제가 바뀌었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친구들끼리 밤새 이야기가 끊이지 않던 대학 시절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흘러갔을 겁니다.

단절적 화제 전환(disjunctive topic transition) — 앞 화제와 이어지는 고리 없이 완전히 새로운 화제를 꺼내는 방식입니다. "근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같은 말이 흔히 앞에 붙습니다.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짧은 간격으로 반복되면 대화가 계속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느낌을 줍니다. 슬기 씨의 드라마, 집값, 연말 계획이 모두 이 방식이었습니다.

비유적 표현(figurative expression) — "결국 넥타이가 합격시킨 셈이네"처럼 앞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며 평가하는 관용적·비유적 말입니다. 홀트와 드루는 이런 표현이 이야기를 정리하는 동시에 다음 화제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요약이 곧 경첩이 되는 셈입니다.

Ep 007의 실타래 질문법은 한 화제 안에서 더 깊이 파고드는 법이었습니다. 이번 회차는 반대 방향입니다. 한 화제가 충분히 끝났을 때, 그 화제를 떠나되 실은 끊지 않고 옆 화제로 옮겨 가는 법입니다.

한 달 뒤 같은 방, 다음 화제를 고른 건 경첩을 쥔 사람이었다

경첩 한 단어를 쥔 사람은 대화를 이어 붙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 갈래의 다음 화제 중 어디로 문을 열지를 고르게 됩니다.

한 달 뒤, 슬기 씨는 같은 노포의 같은 방을 다시 잡았습니다. 이번엔 경민 씨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요즘 주말마다 혼자 캠핑을 다닌다고 했습니다. 경민 씨가 장비 욕심에 텐트를 세 번 바꾼 이야기를 하자, 방 안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조용해졌습니다. 이번엔 슬기 씨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슬기: 텐트를 세 번 바꿨는데 결국 제일 좋았던 건 첫 텐트였다며. 캠핑은 장비가 아니라 어디서 누구랑 보내느냐네.

천경민: 그러니까. 혼자 가니까 편하긴 한데 좀 심심해.

여슬기: 누구랑 가느냐 하니까 생각났다. 우리 2학년 때 동아리 출사, 비 와서 텐트 물에 잠겼던 날 기억나?

모지환: 야, 그날 내 카메라 가방까지 젖었잖아! 그 필름 아직도 집에 있다.

여슬기: 필름 아직 있어? 지환이 너 그 필름 현상은 해 봤어?

모지환: 아니, 못 했지. 무서워서. 근데 이거 셋이 같이 뽑아 보면 재밌겠다.

이야기는 그렇게 한 단어씩 건너갔습니다. 캠핑에서 "누구랑"으로, "누구랑"에서 동아리 출사로, 출사에서 젖은 필름으로. 필름 이야기가 한참 이어지다 웃음이 다시 잦아들었을 때, 슬기 씨는 한 번 더 경첩을 걸었습니다.

여슬기: 결국 그 필름이 우리 셋 마지막 단체 사진인 셈이네. 마지막 사진 하니까, 경민이 너 캠핑 가는 데 우리도 한번 따라가면 안 돼? 이번엔 필름 카메라 챙겨서.

천경민: 오, 진짜? 가평에 내가 자주 가는 데 있어. 11월 둘째 주 어때?

한 달 전, 슬기 씨는 세 번이나 화제를 던졌지만 대화가 어디로 갈지는 매번 친구들의 짧은 대답이 정했습니다. 이번엔 화제를 새로 던지지 않고 앞 이야기의 한 단어를 쥐었습니다. "누구랑", "마지막 사진". 그 단어로 어떤 문을 열지는 슬기 씨가 골랐고, 대화는 결국 셋이 함께 떠나는 가을 캠핑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날 모임은 밤 11시를 넘겨서야 끝났습니다.

이번 회차에서는 이 방식을 "경첩 전환법"이라 부르겠습니다. 문짝 두 개를 잇는 경첩처럼, 방금 끝난 화제의 한 단어를 붙잡아 한쪽은 앞 이야기에 붙여 두고 다른 쪽으로 다음 이야기를 여는 겁니다.

핵심 포인트

침묵을 새 화제로 덮으면 대화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됩니다. 웃음이 터지면 화제가 끝나 간다는 신호로 알아채고, 앞 이야기를 한 줄로 정리한 뒤 그 안의 한 단어를 밟고 옆 화제로 건너가세요. 어느 단어를 밟을지 고르는 사람이 다음 대화의 방향을 정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의

모든 침묵을 없애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는 편안한 침묵도 관계의 일부이고, 누군가 무거운 이야기를 막 끝냈다면 잠깐의 침묵이 오히려 존중이 됩니다. 그럴 때 곧바로 경첩을 걸면 상대의 이야기를 서둘러 덮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또 경첩 단어를 핑계로 매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만 끌고 가면, 대화는 이어져도 다른 사람들은 끌려다니는 느낌을 받습니다. 경첩은 모두가 들어올 수 있는 쪽으로 열어야 합니다.

웃음 뒤 3초 안에 준비할 문장, 이 셋을 놓치면 모임은 일찍 끝납니다

경첩 전환법은 세 개의 문장으로 연습할 수 있습니다. 끝난 화제를 한 줄로 접고, 그 안의 단어를 밟아 건너고, 새 화제의 문을 다른 사람에게 열어 주는 순서입니다.

웃음이 잦아들면, 한 줄로 접어 주기

"결국 ○○는 △△였던 셈이네." 방금 끝난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며 평가합니다. 이 한 줄이 화제를 매듭짓는 동시에, 다음으로 넘어갈 단어를 무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동료의 여행담 뒤라면 "결국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길 잃었던 날이네", 가족의 이사 고생담 뒤라면 "결국 짐보다 무거운 건 버릴지 말지 고민이었네"로 쓸 수 있습니다.

그 한 줄의 단어를 밟고 건너기

"○○ 하니까 생각났는데, △△ 기억나?" 방금 접은 한 줄에서 단어 하나를 골라, 그 단어와 이어지는 옆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함께 아는 기억이나 공통 관심사로 이어 가면 모두가 쉽게 따라옵니다. 회사 동기 모임이라면 "길 잃은 얘기 하니까 생각났다, 우리 신입 연수 때 버스 잘못 탔던 거 기억나?", 명절 가족 모임이라면 "버릴까 말까 하니까 생각났는데, 할머니 댁 다락방 짐은 어떻게 됐어요?"로 쓸 수 있습니다.

새 화제의 문을 다른 사람 쪽으로 열기

"△△ 너는 그거 어떻게 됐어?" 건너간 화제를 내가 계속 끌고 가지 않고, 그 이야기의 주인이 될 만한 사람에게 질문으로 넘깁니다. 특히 한동안 말이 없던 사람 쪽으로 문을 열면, 대화가 한 사람의 독무대가 되지 않고 모두의 것이 됩니다. 소모임에서라면 "연주 씨는 그 공연 직접 가 봤다고 하지 않았어요?", 팀 회식에서라면 "지난번에 그 동네 산다고 하셨죠, 요즘 거기 어때요?"로 쓸 수 있습니다.

오늘의 훈련

오늘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다 다 같이 웃음이 터지면, 그 웃음이 잦아드는 순간 "결국 ○○였던 셈이네"로 한 줄 정리를 먼저 던져 보세요.

써먹기 좋은 자리: 오랜만의 친구 모임, 가족 식사, 점심시간 동료들과의 수다.

모임이 끝난 뒤, 그날 대화가 어떤 단어들을 밟고 흘러갔는지 순서대로 떠올려 보세요. 중간에 "근데 말이야"로 뚝 끊긴 지점이 몇 번이었는지 세어 보면 다음 모임의 과제가 보입니다.

밤 11시가 넘어 셋이 계단을 내려간 뒤, 2층 방에는 불이 꺼진 불판과 빈 잔 세 개만 남았습니다. 한 달 전 같은 자리에 남았던 어색한 조용함과는 다른 고요였습니다. 식탁 한쪽에는 경민 씨가 휴대폰 지도를 보여 주며 짚던 자리, 지환 씨가 필름 통 크기를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던 자리가 아직 따뜻하게 비어 있었습니다.

대화가 끊기는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다리를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화가 끊기는 것보다 곤란한 경우도 있습니다. 끊기지 않고 너무 멀리 흘러가 버리는 대화입니다. 회의 중 팀장의 옛날 이야기가 20분째 이어지고 정작 오늘 정해야 할 안건은 한 줄도 나가지 못했다면, 딴 길로 샌 대화를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본론으로 데려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경첩 한 단어가 정말 침묵을 이길까, 연구가 확인한 범위

경첩 전환법은 실험 연구 하나와 대화 분석 연구 셋을 이어 만든 기법입니다. 각 연구가 말해 주는 것과 말해 주지 않는 것을 나눠 보겠습니다.

근거 정리

매끄러운 대화는 소속감과 자존감, 사회적 인정의 느낌과 이어졌고, 대화 중 한 번의 짧은 침묵은 부정적 감정과 거절감을 불러왔습니다. 두 번째 실험의 침묵은 4초였고, 참가자들은 그 침묵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Koudenburg 외, 2011).

여러 사람이 함께 웃는 순간은 화제가 마무리되는 지점과 자주 겹쳤고, 화제를 이어 가고 싶은 사람은 웃음 대신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Holt, 2010).

앞 이야기를 요약·평가하는 비유적 표현은 앞 화제와 이어지면서도 새 화제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축 역할을 했습니다(Holt & Drew, 2005). 화제를 여러 단계에 걸쳐 조금씩 옮겨 가는 방식은 제퍼슨의 1984년 연구에서 정리됐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의

쿠덴뷔르흐 연구팀의 실험은 글로 된 시나리오를 읽거나 영상을 보며 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방식이었고, 참가자 대부분이 네덜란드 대학생이었습니다. 실제로 대화에 참여하는 상황,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 침묵을 편안하게 여기는 문화에서는 같은 크기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홀트, 드루, 제퍼슨의 연구는 영어권 대화를 관찰해 패턴을 찾아낸 대화 분석 연구입니다. "이렇게 하면 대화가 더 오래 이어진다"는 효과를 실험으로 비교한 것은 아닙니다. 경첩 전환법이 모임을 살린다는 연결은 이 관찰들을 실전에 옮긴 이번 회차의 해석입니다.

여슬기 씨의 모임이 캠핑 약속으로 이어진 것도, 친구들 사이에 원래 쌓여 있던 공통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공통 기억이 적은 사이라면 경첩 단어를 과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보고 들은 것"에서 찾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생각해보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대화가 자꾸 끊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모임에서 화제가 바뀔 때 "근데 말이야"처럼 뚝 끊고 넘어간 적이 몇 번이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할 얘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 사이에 다리가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침묵이 오면 아무 화제나 던지고 있지 않은가?

침묵이 올 때 머릿속에서 새 화제를 찾기 전에, 방금 끝난 이야기에서 기억에 남은 단어 하나를 먼저 떠올려 보세요. 그 단어가 가장 쉽게 건널 수 있는 다리입니다.

나는 모임의 다음 화제를 고르고 있는가, 누가 먼저 꺼내 주기만 기다리고 있는가?

최근 모임에서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를 누가 정했는지 돌아보세요. 경첩 단어를 먼저 쥐는 사람이 다음 대화의 문을 어느 쪽으로 열지 고르게 됩니다.

다 같이 웃고 난 뒤 어색한 침묵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웃음은 화제가 끝나 간다는 신호일 때가 많습니다. 웃음이 잦아들기 직전에 "결국 ○○였던 셈이네"로 이야기를 한 줄로 접어 두면, 침묵이 오기 전에 다음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다.

침묵이 편안한 사이라면 굳이 대화를 이어야 할까?

모든 침묵을 메울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의 표정이 편안하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면 그 침묵을 함께 즐겨도 좋습니다. 경첩은 흐름이 끊겨 누군가 휴대폰을 꺼내기 시작할 때 걸면 됩니다.

참고 자료

Koudenburg, N., Postmes, T., & Gordijn, E. H., 「Disrupting the flow: How brief silences in group conversations affect social needs」,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2011) — 원문 보기

Holt, E., 「The last laugh: Shared laughter and topic termination」, Journal of Pragmatics(2010) — 원문 보기

Holt, E., & Drew, P., 「Figurative Pivots: The Use of Figurative Expressions in Pivotal Topic Transitions」, Research on Language and Social Interaction(2005) — 원문 보기

Jefferson, G., 「On stepwise transition from talk about a trouble to inappropriately next-positioned matters」, Structures of Social Action(Atkinson & Heritage 편), Cambridge University Press(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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