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본 원리 Ep 013 간격 호명법, 명함 속 이름을 살리다

대화의 기본 원리  >  듣기의 기술  >  이름을 붙잡는 듣기  ·  중급

이번 회차 학습 목표: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이 왜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지 이해하고, 첫 만남 안에서 이름을 간격을 넓혀 가며 불러 기억에 붙잡아 두는 법을 익힙니다. Ep 012가 들은 이야기를 한 줄로 적어 다음 만남까지 이어 가는 법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앞선 단계, 첫 만남의 몇 분 안에 사라지는 이름 하나를 붙잡는 법으로 듣기의 기술을 마무리합니다.

이번 회차의 한 문장

오늘부터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을 명함에 맡기지 않고, 대화 속에서 세 번, 점점 간격을 넓혀 가며 직접 부르게 됩니다.

명함을 많이 받을수록, 기억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서른네 살 엄주혁 씨는 직원 셋을 둔 작은 브랜딩 스튜디오의 대표입니다. 10월 첫 목요일 저녁, 구청이 여는 창업 네트워킹 포럼에 다녀온 주혁 씨의 명함지갑에는 새 명함이 서른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부지런히 테이블을 돌았고, 인사도 빠짐없이 했습니다. 지하철에서 명함을 한 장씩 넘겨 보던 주혁 씨는 이상한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얼굴이 떠오르는 명함이 거의 없었습니다.

명함 서른한 장, 그런데 한 달 뒤 불러 줄 수 있는 이름은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은 명함을 받는 순간이 아니라, 그다음 몇 분 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을 때 사라집니다. 명함은 이름을 보관해 줄 뿐, 기억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날 주혁 씨가 가장 오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로컬푸드 협동조합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동네 농가의 채소를 식당에 납품하는 일을 한다고 했고, 새 패키지 디자인을 고민 중이라고 했습니다. 주혁 씨에게는 딱 맞는 잠재 고객이었습니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길나래: 안녕하세요, 길나래입니다. 로컬푸드 협동조합에서 사무국장 하고 있어요.

엄주혁: 아, 네! 엄주혁입니다. 브랜딩 스튜디오 하고 있습니다. (명함을 받아 곧바로 지갑에 넣는다) 협동조합이면 어떤 품목을 주로 다루세요?

길나래: 쌈채소랑 제철 나물이요. 요즘은 식당 말고 가정용 소포장도 해 보려고요.

엄주혁: 오, 소포장이면 패키지가 정말 중요하죠. 저희가 그런 작업 많이 해요.

20분 넘게 이어진 대화에서 주혁 씨는 상대를 "국장님"이라고만 불렀습니다. 이름을 들은 건 첫 문장 한 번뿐이었고, 그 순간 주혁 씨의 머릿속은 자기소개를 어떻게 이어 갈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 달 뒤 같은 포럼, 이름을 먼저 부른 쪽이 대화를 가져갔다

다시 만났을 때 먼저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그 한마디로 두 번째 대화의 방향을 쥡니다. 반대로 이름을 잊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따라가는 쪽이 됩니다.

한 달 뒤, 같은 포럼의 두 번째 모임. 주혁 씨가 음료를 받아 돌아서는데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길나래: 주혁 대표님! 지난번에 소포장 얘기 나눴던 거 기억하세요?

엄주혁: 아, 네, 네! 당연하죠. 그… 협동조합… 국장님.

길나래: (웃음이 잠깐 멈춘다) 길나래요. 괜찮아요, 명함을 워낙 많이 받으셨을 텐데.

길나래: 아, 저기 은호 대표님 오셨다. 은호 대표님, 여기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패키지 건이요.

나래 씨는 다른 디자인 회사 대표에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옮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포장 패키지 일은 그 대표가 맡게 됐다고 했습니다. 주혁 씨는 명함지갑을 꺼내 "길나래"라는 이름을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분명 들었던 이름이었습니다. 20분이나 마주 앉아 있었는데도요.

여러분도 이런 순간을 겪어 보셨을 겁니다. 상대는 내 이름을 또렷하게 부르는데, 나는 "그… 저…"로 시간을 벌던 순간.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상대의 직업도, 하는 일도, 나눈 이야기도 기억합니다. 유독 이름만 사라집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직업은 남고 이름만 지워지는, 우리 기억의 이상한 버릇

사람의 이름은 뜻이 붙어 있지 않은 소리라서 기억에 걸릴 고리가 없습니다. 같은 단어라도 직업으로 들으면 기억나고, 이름으로 들으면 잊히는 이유입니다.

영국의 캐슬린 맥위니 연구팀은 1987년, 사람들에게 낯선 얼굴 사진을 보여 주며 각 얼굴에 이름이나 직업을 짝지어 외우게 했습니다. 영어로 "베이커(Baker)"처럼 성으로도, 직업(제빵사)으로도 쓰이는 단어를 섞어 넣었는데, 같은 단어라도 직업으로 배웠을 때가 이름으로 배웠을 때보다 훨씬 잘 떠올랐습니다.

베이커-베이커 역설(baker-baker paradox) — 똑같은 단어가 직업으로 주어지면 잘 기억나고 이름으로 주어지면 잘 잊히는 현상입니다. 직업은 빵 냄새, 새벽 출근, 밀가루 같은 연상 고리를 줄줄이 끌고 오지만, 이름은 그 자체로는 아무 뜻도 끌고 오지 않기 때문으로 설명됩니다. 주혁 씨가 "협동조합 사무국장"은 기억하면서 "길나래"를 잊은 것이 바로 이 현상입니다.

이 발견이 주는 힌트는 분명합니다. 이름을 붙잡으려면, 이름에 인위적으로라도 뜻의 고리를 걸어 줘야 합니다. "나래"라는 소리를 "날개"와 이어 붙이는 순간, 그 이름은 제빵사처럼 연상을 끌고 다니는 단어가 됩니다.

시끄러운 뒤풀이에서도 귀가 먼저 알아듣는 단어 하나

사람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소리 속에서도 자기 이름만큼은 알아듣습니다. 이름은 상대의 주의를 가장 확실하게 붙잡는 단어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네빌 모레이는 1959년, 참가자에게 양쪽 귀로 서로 다른 말을 들려주고 한쪽 귀의 말만 따라 하게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무시한 쪽 귀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시한 쪽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면, 적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양분 청취(dichotic listening) — 양쪽 귀에 서로 다른 소리를 동시에 들려주고, 사람이 어느 쪽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엇을 걸러 내는지 살피는 실험 방법입니다. 주의가 어떻게 정보를 골라 받아들이는지 연구하는 고전적인 도구입니다. 모레이는 이 방법으로 "무시한 소리도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줬습니다.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 — 여러 사람이 떠드는 시끄러운 자리에서도 원하는 목소리에 집중하고, 다른 쪽에서 내 이름이 들리면 곧바로 알아채는 현상입니다. 이름이 우리 주의 체계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단어라는 뜻입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은호 대표님!" 한마디에 그 사람이 곧장 고개를 돌린 것도 이 효과입니다.

이 대목에서 사례를 다시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두 번째 모임에서 대화의 방향을 정한 건 나래 씨였습니다. 주혁 씨를 이름으로 불러 대화를 열었고, 은호 대표를 이름으로 불러 대화를 옮겼습니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자리 안에서 누구의 주의를 언제 불러올지 고를 수 있습니다.

이름 하나 기억했을 뿐인데, 상대는 칭찬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이름을 기억해 불러 주는 일은, 받는 사람에게 하나의 칭찬으로 전달됩니다. 반대로 잊었다고 해서 곧바로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기억은 벌점을 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가점을 얻는 수단에 가깝습니다.

대니얼 하워드 연구팀은 1995년, 세 번의 실험으로 이름 기억의 효과를 살폈습니다. 한 번 만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부른 경우, 상대가 그 사람의 구매 요청에 응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연구팀은 이 효과가 "나를 기억해 줬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름을 잊어버린 경우라고 해서 응하는 비율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고양 욕구(need for self-enhancement) — 자신을 긍정적으로 느끼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하워드 연구팀은 이 욕구가 강한 상황일수록 이름을 기억해 주는 효과가 더 뚜렷하다고 보고했습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소개하느라 애쓰는 네트워킹 자리는 이 욕구가 특히 커지는 곳입니다.

이 결과는 주혁 씨에게 조금 아프게 읽힙니다. 이름을 잊은 대가로 무언가를 잃은 게 아니라, 이름을 불러 줬다면 얻었을 한 걸음을 얻지 못한 겁니다. 소포장 패키지 일을 가져간 은호 대표는 아마 나래 씨의 이름을 처음부터 정확히 불렀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스쳐 가듯 들은 이름을, 어떻게 20분 안에 기억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요?

같은 세 번이라도, 언제 부르느냐가 기억을 두 배로 가른다

이름은 여러 번 부르는 것보다 간격을 점점 넓혀 가며 부를 때 훨씬 오래 남습니다. 바로 한 번, 조금 뒤에 한 번, 한참 뒤에 한 번. 이 순서가 기억을 붙잡습니다.

토머스 랜다우어와 로버트 비요크는 1978년, 수백 명의 학생에게 가상 인물의 이름을 외우게 하면서 중간중간 이름을 떠올려 보게 했습니다. 이름을 떠올리는 횟수는 같게 두고, 그 사이 간격만 바꿨습니다. 간격을 점점 넓혀 간 조건이 이름을 한 번 보기만 한 조건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이 기억해 냈고, 간격을 똑같이 두거나 점점 좁혀 간 조건보다도 앞섰습니다. 얼굴과 이름을 짝지은 실험에서도 결과는 같은 방향이었습니다.

인출 연습(retrieval practice) — 정보를 다시 보는 대신, 머릿속에서 스스로 꺼내 보는 연습입니다. 꺼내는 행위 자체가 기억의 길을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보다 대화 중에 상대의 이름을 떠올려 입으로 부르는 것이 더 강한 연습이 되는 이유입니다.

확장 간격 연습(expanding retrieval practice) — 인출 사이의 간격을 처음엔 짧게, 갈수록 길게 늘려 가는 방식입니다. 처음엔 쉽게 떠올릴 수 있어 실패하지 않고, 뒤로 갈수록 적당히 어려워져 기억이 더 깊이 박힙니다. 첫 만남에서는 "바로 다음 문장, 몇 분 뒤, 헤어질 때"가 자연스러운 확장 간격이 됩니다.

균등 간격 연습(uniform retrieval practice) — 인출 사이의 간격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연습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랜다우어와 비요크의 실험에서는 같은 횟수의 확장 간격 연습보다 결과가 낮았습니다. 대화 초반에 이름을 연달아 세 번 부르고 그 뒤로 한 번도 부르지 않는 것은 효과가 더 떨어지는 배치입니다.

세 번의 호명, 테이블의 방향을 정한 건 이름을 쥔 쪽이었다

이름을 붙잡은 사람은 기억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섞인 자리에서 누구를 누구에게 이어 줄지 정하는 연결자가 됩니다.

석 달 뒤, 포럼의 연말 모임. 이번에 주혁 씨는 명함을 받자마자 지갑에 넣지 않았습니다. 테이블 위에 명함을 내려놓고, 상대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차윤겸: 차윤겸입니다. 수제 소스 만드는 작은 공방을 하고 있어요.

엄주혁: 윤겸 대표님, 반갑습니다. 겸손할 때 그 겸 자 쓰시나요?

차윤겸: 하하, 네 맞아요. 이름 뜻 물어보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엄주혁: 윤겸 대표님, 소스면 병 디자인이 제일 고민이시겠어요.

한 번은 인사 직후, 한 번은 그다음 질문에서. 주혁 씨는 속으로 "겸손한 소스 장인"이라는 짧은 그림을 이름 위에 걸어 두었습니다. 10분쯤 이야기가 흐른 뒤, 옆자리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습니다. 길나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엄주혁: 나래 국장님! 오셨어요. 지난번엔 제가 성함을 놓쳐서 죄송했어요. 날개라는 뜻의 나래, 이번엔 확실히 외웠습니다.

길나래: (웃으며) 어머, 기억하시네요.

엄주혁: 나래 국장님, 여기 윤겸 대표님이 수제 소스를 만드시는데, 국장님 조합 쌈채소랑 같이 묶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겸 대표님, 이분이 제가 말씀드린 로컬푸드 협동조합 길나래 국장님이세요.

차윤겸: 어, 쌈채소에 소스 세트요? 그거 저도 해 보고 싶었던 건데요.

그날 세 사람은 한 시간 가까이 "쌈채소와 소스 선물 세트" 이야기를 나눴고, 패키지 디자인은 자연스럽게 주혁 씨 몫이 됐습니다. 모임이 끝날 무렵, 주혁 씨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이름을 한 번씩 더 부르며 인사했습니다. "윤겸 대표님, 나래 국장님, 다음 주에 셋이서 한번 뵈어요." 세 번째 호명이었습니다.

석 달 전, 주혁 씨는 이름을 잊어 대화의 방향을 나래 씨에게 넘겼습니다. 이번엔 두 사람의 이름을 쥐고 있었기에, 누구를 누구에게 이어 줄지 주혁 씨가 정했습니다. 테이블의 대화가 어디로 흐를지는, 모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고른 겁니다.

이번 회차에서는 이 방식을 "간격 호명법"이라 부르겠습니다. 이름을 들은 순간 뜻의 고리를 하나 걸고, 대화 속에서 바로 한 번, 몇 분 뒤 한 번, 헤어질 때 한 번, 간격을 넓혀 가며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겁니다.

핵심 포인트

이름은 명함에 적혀 있을 때가 아니라 내 입으로 부를 때 기억에 남습니다. 뜻의 고리를 걸고, 간격을 넓혀 가며 세 번 부르세요. 모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의 연결을 설계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의

이름을 문장마다 붙이면 영업 교본을 외운 사람처럼 들립니다. 세 번이면 충분하고, 그 이상은 오히려 부담을 줍니다. 한국에서는 윗사람이나 처음 만난 연장자를 이름만으로 부르면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윤겸 대표님", "나래 국장님"처럼 이름 뒤에 직함이나 "님"을 붙이세요. 이름의 뜻을 묻는 것도 상대가 편안해 보일 때 가볍게 한 번이면 족합니다. 이름을 잊었다면 얼버무리지 말고 "죄송해요, 성함을 한 번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솔직하게 묻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 저…"로 시간을 벌지 않으려면, 이 세 번의 타이밍을 잡으세요

간격 호명법은 첫 만남의 세 지점에서 한 번씩 쓰는 문장으로 연습할 수 있습니다. 듣는 순간, 대화 중간, 헤어지는 순간입니다.

듣는 순간, 이름을 되부르며 뜻의 고리 걸기

"○○ 님, 반갑습니다. 혹시 △△ 할 때 그 ○ 자 쓰시나요?"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다음 문장에서 한 번 부르고, 이름에 뜻이나 그림을 하나 걸어 둡니다. 한자 뜻을 묻지 않더라도 속으로 "소스 만드는 윤겸"처럼 하는 일과 이름을 한 덩어리로 묶어 두면 됩니다. 새 팀원과의 첫 인사라면 "하린 님, 반가워요. 저희 팀에 하 씨는 처음이에요", 학부모 모임이라면 "지우 어머님, 지우랑 저희 애가 같은 반이죠?"로 바꿔 쓸 수 있습니다.

몇 분 뒤, 질문 앞에 이름을 붙이기

"○○ 님은 그럼 △△는 어떻게 하세요?" 이야기가 한동안 흐른 뒤, 질문을 던질 때 이름을 앞에 붙여 두 번째로 부릅니다. 머릿속에서 이름을 한 번 꺼내 보는 인출 연습이 되고, 상대는 자기 이름이 불리는 순간 주의를 다시 모읍니다. 워크숍 조별 활동이라면 "민서 님은 이 안에서 어떤 쪽이 더 끌리세요?", 동호회 첫 산행이라면 "태경 님은 이 코스 몇 번째세요?"로 쓸 수 있습니다.

헤어질 때, 이름으로 마지막 인사하기

"○○ 님, 오늘 △△ 얘기 정말 좋았어요." 자리를 뜨기 직전, 가장 긴 간격을 두고 세 번째로 이름을 부릅니다. 이 마지막 호명이 기억을 가장 단단하게 만들고, 상대에게는 "이 사람은 나를 기억한다"는 마지막 인상을 남깁니다. 거래처 첫 미팅 끝이라면 "정우 과장님, 오늘 정리해 주신 일정 덕분에 한결 명확해졌어요", 소개받은 지인과 헤어질 때라면 "수아 씨, 추천해 준 책 꼭 읽어 볼게요"로 쓸 수 있습니다.

오늘의 훈련

오늘 처음 이름을 듣는 사람이 생기면, 인사 직후, 대화 중간 질문, 헤어질 때 이렇게 세 번 이름을 불러 보세요. 이름을 들은 순간 속으로 그 사람이 하는 일과 이름을 한 덩어리로 묶어 두는 것도 잊지 마세요.

써먹기 좋은 자리: 세미나나 모임 뒤풀이, 새로 온 동료와의 첫 점심, 아이 친구 부모님과의 첫 인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명함을 보지 않고 오늘 만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 보세요. 떠오른 이름의 개수가 오늘 훈련의 점수입니다.

그날 밤, 주혁 씨의 명함지갑에는 새 명함이 네 장뿐이었습니다. 석 달 전 서른한 장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네 장의 뒷면에는 연필로 쓴 짧은 단어가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겸손한 소스, 날개. 지하철 창에 비친 명함 네 장 위로, 네 사람의 얼굴이 하나도 빠짐없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명함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불러 준 자기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시작한 대화도, 한 주제가 끝나는 순간 뚝 멈춰 버릴 때가 있습니다. 소스 이야기가 끝나고 세 사람이 동시에 음료잔만 만지작거리는 그 몇 초. 그 침묵 앞에서 대화를 다음 화제로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붙잡고 있는 걸까요?

이름 세 번이면 된다는 말, 연구는 어디까지 보장할까?

간격 호명법은 기억 실험과 설득 실험을 이어 붙여 만든 기법입니다. 각 연구가 확인한 것과, 그것을 모임 자리의 대화로 옮길 때 조심할 점을 나눠 보겠습니다.

근거 정리

같은 단어도 얼굴에 직업으로 짝지어졌을 때가 이름으로 짝지어졌을 때보다 더 잘 기억됐습니다(McWeeny 외, 1987).

한쪽 귀의 말을 무시하도록 한 실험에서도, 사람들은 무시한 쪽에서 나온 자기 이름은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Moray, 1959).

이름을 떠올리는 간격을 점점 넓혀 간 조건은 한 번 보기만 한 조건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이 기억했고, 같은 간격이나 줄어드는 간격보다도 결과가 좋았습니다(Landauer & Bjork, 1978).

이름을 기억해 부르면 상대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였고, 구매 요청에 응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이름을 잊었을 때 응하는 비율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Howard 외, 1995).

이런 상황이라면 주의

랜다우어와 비요크의 실험은 카드에 적힌 가상 인물의 이름을 외우는 실험실 과제였고, 간격도 "사이에 낀 항목 수"로 정해졌습니다. 실제 대화에서 "인사 직후, 몇 분 뒤, 헤어질 때"가 최적의 간격이라는 것은 이 연구를 옮겨 적용한 이번 회차의 해석입니다. 이후 연구들에서는 장기 기억에 확장 간격이 늘 균등 간격보다 낫지는 않다는 결과도 나와 있으니, 핵심은 "한꺼번에 몰아서 부르지 말고 나눠서 부른다"는 점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맥위니 연구와 모레이 연구는 영어권에서 이뤄졌습니다. 한국어 이름은 한자 뜻이 있는 경우가 많아 뜻의 고리를 걸기가 오히려 수월할 수 있지만, 한글 이름이나 한자를 묻는 것이 어색한 상황도 있습니다. 모레이의 실험에서도 무시한 쪽의 자기 이름을 알아차린 사람은 일부였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워드 연구팀의 실험은 판매 요청에 응하는 행동을 측정한 것입니다. 엄주혁 씨의 사례처럼 이름 하나가 일감을 가져온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이름을 기억해 준 뒤 대화의 내용이 부실하면 그 칭찬 효과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기

처음 만난 사람 이름을 금방 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모임에서 만난 사람의 직업과 이름 중 무엇이 더 잘 떠오르는지 비교해 보세요. 직업만 떠오른다면, 이름에 뜻의 고리를 걸지 않은 채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명함을 받으면 나는 바로 지갑에 넣고 있지 않은가?

명함을 테이블 위에 두거나 손에 쥔 채 대화해 보세요. 이름을 볼 수 있는 동안 한 번 더 부를 기회가 생기고, 그 호명이 기억을 붙잡는 첫 연습이 됩니다.

나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의 연결을 정하고 있는가, 소개받기만 기다리고 있는가?

지난 모임에서 내가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게 이름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세요. 이름을 쥔 사람이 누구를 누구에게 이어 줄지 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상대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얼버무리며 호칭으로 넘기기보다 "죄송해요, 성함을 한 번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솔직하게 물어보세요. 다시 들은 순간이 곧 간격 호명법의 첫 번째 호명이 됩니다.

대화 중에 상대 이름을 너무 자주 부르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래서 세 번이면 충분합니다. 인사 직후, 대화 중간 질문, 헤어질 때처럼 간격을 두고 부르면 자연스럽고, 한국식 호칭을 붙이면 예의도 지킬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McWeeny, K. H., Young, A. W., Hay, D. C., & Ellis, A. W., 「Putting names to faces」,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1987) — 원문 보기

Moray, N., 「Attention in Dichotic Listening: Affective Cues and the Influence of Instructions」, Quarterly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1959) — 원문 보기

Landauer, T. K., & Bjork, R. A., 「Optimum rehearsal patterns and name learning」, Practical Aspects of Memory(1978) — 원문 보기

Howard, D. J., Gengler, C., & Jain, A., 「What's in a Name? A Complimentary Means of Persuasion」, Journal of Consumer Research(1995) —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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