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 합의가 쉬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가장 어렵습니다. 같은 말 뒤에 서로 다른 이유가 숨어 있는데, 모두가 상대도 자기와 같은 이유로 그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칠순 점심을 마친 한정식집 별실. 상이 치워진 자리에 녹차 잔 세 개가 남았습니다. 부모님이 먼저 일어나 차에 오르시자, 삼 남매는 다가오는 추석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셋 모두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우리 집에서 하자."
이 글의 학습 목표
Ep 11부터 Ep 13까지가 한 명의 상대가 품은 사정을 다뤘다면, 이번 회차는 세 사람 이상이 한 테이블에 앉은 자리로 넓혀 앞 회차들을 심화합니다. 읽고 나면 다자 협상에서 안건을 하나씩 정하고 다수결로 밀어붙일 때 무엇이 무너지는지 설명할 수 있고, 같은 요구 뒤의 서로 다른 이유를 한꺼번에 엮는 순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같은 문장을 말한 세 사람, 갈라진 별실
첫째 명태호 씨는 부모님과 같은 대전에 삽니다. 둘째 명수경 씨는 서울에서 세 살, 다섯 살 아이를 키우고, 막내 명가람 씨는 대전 옆 세종의 새 아파트로 얼마 전 이사했습니다.
명태호 아버지 수술하신 지 얼마 안 됐잖아. 이번엔 우리 집에서 하자.
명수경 아니, 이번엔 우리 집에서 하면 안 돼? 애들 데리고 내려가는 게 너무 힘들어.
명가람 나도 이번엔 우리 집에서 하고 싶은데… 집들이도 못 했고.
명태호 일단 장소부터 정하자. 손 들어. 대전 우리 집 찬성?
명수경 …아버지 생각하면 오빠네가 맞긴 하지. 나도 오빠네.
명가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음식은 알아서들 정해.
장소는 2대 1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안건인 음식 분담으로 넘어가자 막내는 휴대폰만 들여다봤고, 둘째는 아이들 낮잠 시간을 핑계로 먼저 일어섰습니다. 추석 당일, 둘째네는 왕복 여섯 시간을 운전했고, 막내는 오후 늦게 잠깐 들렀다 일찍 돌아갔습니다. 장소는 정해졌지만 명절은 아무도 원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정하고 다수결로 끝내면 깔끔하다"는 진행법
명태호 씨의 진행 방식은 회의를 빨리 끝내는 정석처럼 보입니다. 안건을 하나씩 떼어 정하고, 의견이 갈리면 손을 들어 다수를 따른다. 가족 모임이든 회사 회의든 흔히 쓰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 방식은 세 사람이 같은 문장을 말한 이유를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야말로 셋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열쇠였습니다.
한 안건씩 표결하면 이유는 사라지고 편만 남는다
이 장면을 대화의 구조로 보면, 진행 방식 두 가지가 합의의 가능성을 차례로 닫았습니다.
첫째, 안건의 분리입니다. "장소부터 정하자"는 말과 함께 장소는 다른 안건과 떨어져 혼자 저울에 올랐습니다. 장소만 놓고 보면 세 집 중 한 집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 숙박, 시간, 비용을 함께 올렸다면 장소에서 진 사람이 다른 곳에서 얻을 길이 생깁니다. 안건을 하나씩 떼어내는 순간, 주고받을 재료가 사라진 거죠.
둘째, 다수결의 연합입니다. 손을 드는 순간 두 사람은 같은 편이 되고, 한 사람은 진 편이 됩니다. 진 사람에게는 남은 안건에 성의를 보일 이유가 없어집니다. 막내가 "알아서들 정해"라며 물러난 것은 성격 탓이 아니라, 진행 방식이 그를 테이블 밖으로 밀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이유는 실제로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첫째의 이유는 부모님의 이동 거리, 둘째의 이유는 아이들과의 장거리 이동과 잠자리, 막내의 이유는 처음으로 가족을 맞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세 이유를 한 번에 놓고 보면, 셋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순차적 논의와 동시적 논의
순차적 논의는 안건을 하나씩 정하고 넘어가는 방식이고, 동시적 논의는 여러 안건을 한꺼번에 테이블에 올려 함께 조정하는 방식입니다. 안건마다 사람들이 두는 무게가 다를 때, 동시적 논의에서는 '이건 양보하고 저건 얻는' 교환이 가능해집니다.
한꺼번에 논의하고 모두가 동의해야 할 때 더 좋은 합의가 나왔다
Weingart 연구진은 1993년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에 실린 두 개의 연구에서 네 명으로 이뤄진 집단이 여러 안건을 놓고 협상하는 과정을 살폈습니다. 집단마다 안건을 하나씩 다루게 하거나 한꺼번에 다루게 했고, 협력적인 태도와 개인적인 태도도 함께 비교했습니다.
안건을 한꺼번에 다룬 집단은 합의의 질이 더 높았고,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도 더 높았습니다. 과정을 들여다보니 이 집단들은 정보를 더 많이 주고받았고, 다른 사람들의 우선순위를 더 잘 이해했습니다. 협력적인 태도를 가진 집단 역시 합의의 질이 높았고, 서로를 더 신뢰하며 덜 다퉜습니다. 이들은 안건을 하나씩 다루는 불리함도 서로 주고받는 규범으로 극복했습니다.
결정 방식의 효과는 그보다 앞선 연구에서 확인됐습니다. Thompson, Mannix, Bazerman은 1988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연구에서 소집단 협상의 결정 규칙을 비교했습니다.
만장일치 규칙을 쓴 집단은 다수결 규칙을 쓴 집단보다 서로의 이익을 엮어 더 높은 공동 성과에 도달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리고 명시적인 안건 순서와 다수결을 함께 쓴 집단은 자원을 더 불평등하게 나눴고, 나머지 한 사람에게 맞서는 연합을 만들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명태호 씨가 쓴 방식이 정확히 그 조합이었습니다. 안건 순서를 정하고, 손을 들어 다수를 따랐죠. 연구가 경고한 연합이 별실에서 그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연합 형성 (coalition formation)
세 사람 이상이 협상할 때 일부가 손을 잡고 나머지보다 유리한 결과를 만드는 현상입니다. 다수결은 연합 하나만 있으면 결론이 나기 때문에, 진 쪽의 이유를 들을 필요를 없애 버립니다.
한 상에 다 올리기, 이유를 모으고 안건을 묶는 법
이 채널은 이 기법을 '한 상에 다 올리기'라고 부르겠습니다. 명절 상에 음식을 한꺼번에 차리듯, 결정해야 할 모든 안건과 각자의 이유를 한 테이블에 동시에 올린 뒤 묶음으로 정하는 방법입니다. 세 단계로 진행합니다.
첫째, 결론보다 이유를 먼저 한 바퀴 돌립니다. 각자에게 "왜 그 집이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Ep 11에서 다룬 장면으로 묻기처럼 "어떤 명절이면 좋겠는지"를 묻습니다. 세 사람의 이유가 모두 나오기 전에는 장소를 꺼내지 않습니다.
둘째, 안건을 한꺼번에 펼칩니다. 장소, 이동, 잠자리, 음식, 비용을 한 줄씩 적어두고, 각 안건이 누구의 이유와 연결되는지 이름을 붙여 봅니다. 한 사람이 장소에서 양보해도 다른 안건에서 얻을 길이 보이게 됩니다.
셋째, 손을 들지 않고 셋 다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묶음을 고칩니다. 다수결 대신 '전원 동의'를 규칙으로 두면, 누구도 진 편이 되지 않고 모두가 끝까지 테이블에 남습니다.
"장소 정하기 전에, 각자 어떤 명절이면 좋을지부터 한 명씩 얘기해볼까?"
"장소, 이동, 잠자리, 음식, 비용까지 한꺼번에 적어놓고 같이 맞춰보자."
"손 들어서 정하지 말고, 셋 다 괜찮다고 할 때까지 고쳐보자."
같은 별실, 한 장의 메모지에 담긴 세 개의 이유
이번에는 막내가 가장 먼저 해법을 꺼냈습니다.
명태호 장소 정하기 전에, 각자 어떤 명절이면 좋을지부터 얘기해볼까? 나는 아버지가 오래 차 안 타시는 게 제일 중요해.
명수경 나는 애들이 낯선 데서 밤에 깨서 우는 게 제일 걱정이야. 따로 잘 방만 있으면 내려가는 건 괜찮아.
명가람 나는… 한 번쯤 내가 차려보고 싶었어. 늘 형이랑 누나가 했잖아. 우리 집 손님방 비어 있어. 부모님 댁에서 20분이고.
명태호 그럼 내가 부모님 모시고 가고, 전은 내가 부쳐 갈게.
명수경 우린 손님방에서 자고, 장보는 비용은 내가 낼게. 셋 다 괜찮지?
"우리 집에서 하자"는 같은 문장이 세 개의 다른 이유로 풀리자, 막내의 새 아파트라는 답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은 20분만 이동하고, 둘째네 아이들은 따로 방에서 자고, 막내는 처음으로 가족을 맞았습니다.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고, 누구도 진 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안건을 하나씩 표결했을 때
장소가 2대 1로 정해지며 막내는 진 편이 됐고, 남은 안건에서 손을 뗐습니다. 둘째네는 아이들과 장거리 왕복을 했고, 막내는 잠깐 들렀다 떠났습니다. 결정은 빨랐지만 아무의 이유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한 상에 다 올렸을 때
세 사람의 이유가 모두 담긴 묶음이 나왔습니다. 이동 거리, 잠자리, 처음 차려보는 상까지 한 번에 해결됐고, 음식과 비용 분담도 각자 자발적으로 맡았습니다.
가족 모임, 팀 회의, 동업자 회의에서
가족 사이에서는 한 상에 다 올리기의 첫 단계, 이유 돌리기가 가장 큰 힘을 냅니다. 명가람 씨의 "한 번쯤 내가 차려보고 싶었다"처럼, 가족의 이유에는 오래 말하지 못한 서운함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회사의 팀 회의라면 전원 동의 규칙을 그대로 쓰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최종 결정권자를 따로 두되, 결정 전에 안건을 한꺼번에 펼치고 각자의 이유를 기록하는 단계만큼은 지키는 편이 좋습니다. 연구에서도 동시적 논의 자체가 정보 교환과 우선순위 이해를 높였습니다.
동업자 셋이 수익 배분을 정할 때처럼 이해관계가 큰 자리라면, 다수결은 특히 위험합니다. 2대 1 연합이 한 번 생기면 다음 결정에서도 같은 구도가 반복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한 상에 다 올려도 풀리지 않는 자리
전원 동의는 시간이 듭니다. 결정해야 할 일이 급하거나 인원이 열 명을 넘어간다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이유를 모으는 단계까지만 함께하고, 결정은 정해진 방식으로 내리는 절충이 필요합니다.
전원 동의는 거부권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끝까지 고개를 젓는다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 한 사람의 이유가 아직 테이블에 오르지 않았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고, 그래도 막힌다면 Ep 31 이후에 다룰 막힌 대화를 다시 여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연구의 범위도 짚어둡니다. 두 연구 모두 실험실에서 설계된 집단 협상 과제를 썼고, 참가자는 서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십 년의 서열과 감정이 얽힌 형제 사이에서는 '전원 동의'가 맏이의 눈치를 보는 침묵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돌릴 때는 막내부터 말하게 하는 식으로 순서를 바꿔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같은 요구를 표결하면 한 사람만 이기고, 그 요구 뒤의 이유를 모으면 모두가 이길 자리가 보입니다.
삼 남매가 별실을 나간 뒤, 상 위에는 식은 녹차 잔 세 개와 누군가 냅킨에 적어둔 다섯 줄의 메모만 남았습니다. 종업원이 그 냅킨을 치우기 전까지, 빈 별실에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삼 남매는 적어도 각자의 이유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인 사이에서 함께 살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상대가 "응, 좋아"라고 답하면서도 표정 어딘가에 말하지 않은 걱정을 숨기고 있다면 어떨까요? 반대조차 하지 않는 사람의 진짜 마음은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참고 자료
- Weingart, L. R., Bennett, R. J., and Brett, J. M. (1993). The impact of consideration of issues and motivational orientation on group negotiation process and outcome. Journal of Applied Psychology, 78(3), 504–517 — 원문 정보
- Thompson, L., Mannix, E., and Bazerman, M. (1988). Group negotiation: Effects of decision rule, agenda, and aspira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6–95 — 원문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