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창문은 열고 금고는 닫기, 아파트 매수에서 꺼낼 말과 숨길 말

"대출은 7억까지 승인 났고요, 아이 학교 때문에 이 단지로 꼭 와야 해서요." 피은호 씨가 이 말을 끝내자, 매도인 설경자 씨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가격 이야기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솔직함은 그 자체로 미덕이지만, 협상에서는 무엇에 대해 솔직하냐가 결과를 가릅니다. 피은호 씨는 가장 숨겨야 할 두 가지를 가장 먼저 꺼냈고, 정작 꺼내야 했던 한 가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Ep 12의 첫 5분 겹침 찾기는 같은 회사 사람끼리 걸린 것을 모두 펼쳐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회차는 처음 만난 상대 앞에서 무엇을 펼치고 무엇을 접어야 하는지를 다루며 앞 회차와 대비를 이룹니다. 읽고 나면 공개하면 함께 얻는 정보와 공개하면 나만 잃는 정보를 구분할 수 있고, 상대의 숨은 정보를 꺼내는 질문까지 함께 설계할 수 있습니다.

찻잔이 내려앉은 순간 정해진 가격

초등학교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15층, 남향 거실. 매물 가격은 7억 5천이었습니다. 집을 둘러본 피은호 씨는 거실 식탁에 앉아 매도인과 마주했습니다. 공인중개사가 옆에서 대화를 거들었죠.

피은호 집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대출은 7억까지 승인 났고요, 아이가 내년에 저 학교 들어가야 해서 이 단지로 꼭 와야 하거든요.

설경자 그러시구나. 이 라인이 학교 가깝기로는 제일이죠.

피은호 그래서 말인데요, 7억 2천은 어떠실까요?

설경자 학교 때문에 오시는 분들이 꽤 있어서요. 7억 4천 아래로는 어렵겠어요.

피은호 혹시 집에 문제 있는 곳은 없죠?

"네, 깨끗해요." 설경자 씨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계약은 7억 4천에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입주 후 첫 장마, 작은방 베란다 벽에서 물 자국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랫집 이웃이 지나가듯 말했습니다. "그 집, 재작년에도 거기서 샜었는데."

"정직하게 다 보여주면 상대도 정직해진다"는 기대

피은호 씨가 대출 한도와 학교 사정을 먼저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진지한 매수인이라는 걸 보여주면 매도인도 성의를 보여줄 거라 믿었죠.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상대도 열어준다는 기대였습니다.

결과는 반대로 흘렀습니다. 그녀의 솔직함은 매도인의 숫자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정작 매도인의 정직함은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천장과 절박함을 꺼내면 숫자는 거기에 붙는다

이 장면에서 피은호 씨가 꺼낸 정보를 구조적으로 나눠 보면, 세 종류가 섞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천장 정보입니다. "대출 7억까지 승인"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금액을 알려줍니다. 상대 입장에서 이 숫자는 Ep 01에서 다룬 기준점이 되어, 7억 2천을 들어도 '아직 2천 더 여유가 있다'로 읽힙니다.

두 번째는 절박함 정보입니다. "이 단지로 꼭 와야 한다"는 내가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고백입니다. Ep 03에서 그렸던 맞은편 지도를 이번에는 내가 상대에게 직접 그려준 셈이죠. 설경자 씨의 "학교 때문에 오시는 분들이 꽤 있어서요"는 그 지도를 읽고 나온 답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질문의 모양입니다. "문제 있는 곳은 없죠?"는 '없다'를 정답으로 깔아둔 질문입니다. 대답하는 사람은 그 정답에 맞춰 짧게 끝내면 됩니다. 하자를 숨기려는 사람에게 가장 편한 질문이었습니다.

정보 딜레마 (information dilemma)

내 우선순위를 알려주면 서로에게 더 좋은 합의를 찾을 수 있지만, 같은 정보가 상대에게 나를 압박할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정보를 공개할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정보가 함께 나눌 몫을 키우고 어떤 정보가 내 몫을 줄이는지를 가리는 문제입니다.

선호를 드러낸 쪽이 비싸게 치렀고, 질문의 모양이 거짓말을 갈랐다

Murnighan, Babcock, Thompson, Pillutla는 1999년 International Journal of Conflict Management에 실린 연구에서 이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우선순위를 드러내면 더 효율적인 합의가 가능하지만, 상대가 그 정보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드러낸 쪽에 불리하게 쓸 수 있습니다. 두 번의 실험에서 자기 선호를 드러내는 것은 대가가 컸고, 경험 많은 협상자는 그렇지 않은 상대를 큰 차이로 이겼습니다. 그 차이는 나눠 갖는 성격의 쟁점에서, 걸린 보상이 클 때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반면 함께 이익을 키울 수 있는 쟁점에서는 공유된 정보가 공동의 이익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아파트 가격은 전형적인 나눠 갖기 쟁점입니다. 매도인이 더 받으면 매수인이 그만큼 더 냅니다. 피은호 씨는 바로 그 쟁점에 대해 자기 패를 다 보여줬습니다.

하자 질문의 실패는 Minson, VanEpps, Yip, Schweitzer의 2018년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연구가 설명합니다. 이들은 문제가 있다고 전제하는 질문, 문제가 없다고 전제하는 질문, 아무 전제 없는 일반 질문을 비교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전제하는 질문은 나머지 두 질문보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실을 더 많이 털어놓게 만들었고, 대면 채용 면담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연구진은 이 차이가 질문하는 사람이 얼마나 단호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느냐에서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흔하지 않은 문제를 단정적으로 물으면 질문자가 더 부정적으로 평가됐습니다.

부정 전제 질문 (negative assumption question)

문제가 이미 있다고 가정하고 그 내용을 묻는 질문입니다. "문제 있는 곳은 없죠?" 대신 "손보신 곳은 어디였어요?"라고 묻는 식이죠. 답하는 사람에게 '없다'로 짧게 끝낼 출구를 주지 않고, 질문자가 이미 사정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창문은 열고 금고는 닫기, 공개할 정보를 둘로 가르는 법

이 채널은 이 기법을 '창문은 열고 금고는 닫기'라고 부르겠습니다. 내 정보를 둘로 나눠, 상대와 함께 이익을 키울 수 있는 정보는 창문처럼 활짝 열고, 나눠 갖는 몫을 줄이는 정보는 금고처럼 닫아두는 방법입니다. 세 단계로 진행합니다.

첫째, 금고에 넣을 것을 먼저 정합니다. 최대 예산, 대출 한도, '여기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 이 셋은 공개하는 순간 상대가 가져갈 몫만 늘립니다. Ep 09에서 다룬 나 혼자 짊어진 시간 비용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둘째, 창문으로 열 것을 찾습니다. 나에게는 덜 중요하지만 상대에게는 중요할 수 있는 조건들입니다. 입주 날짜의 유연함, 가구나 가전의 인수 여부, 잔금 방식. 이런 정보는 공개할수록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늘어나고, 그만큼 가격에서 돌려받을 여지가 생깁니다.

셋째, 상대의 금고는 부정 전제 질문으로 두드립니다. 하자, 급한 사정, 이전 거래 이력처럼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을 정보는 '있다'를 전제로 묻습니다.

"저희는 입주 날짜를 꽤 유연하게 맞출 수 있어요. 매도인분 이사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20년 된 집이니까 손보신 곳들이 있을 텐데, 최근에 수리하신 데는 어디였어요?"

"주변 시세랑 수리 상황을 같이 보고 7억 1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은 창문을 엽니다. 두 번째 문장은 상대의 금고를 두드립니다. 세 번째 문장은 숫자를 말하되, 그 근거로 내 한도가 아니라 시세와 집의 상태를 듭니다. 대출 7억이라는 금고는 끝까지 닫혀 있습니다.

같은 식탁, 다른 정보가 오간 오후

이번에는 매도인 쪽에서 먼저 사정이 나왔습니다.

피은호 저희는 입주 날짜를 꽤 유연하게 맞출 수 있어요. 이사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설경자 실은 딸네 근처로 가는데, 그 집 공사가 내년 3월에 끝나요. 그때까지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다들 빨리 들어오고 싶어 해서요.

피은호 3월 입주면 저희도 괜찮아요. 그리고 20년 된 집이니 손보신 곳들이 있을 텐데, 최근에 수리하신 데는 어디였어요?

설경자 아… 재작년에 작은방 베란다 쪽이 한 번 샜어요. 그때 임시로만 막아뒀고요.

피은호 그 부분 방수까지 감안해서 7억 1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경자 3월까지 살게 해주시는 거면… 7억 1천에 방수 공사는 제가 하고 나갈게요.

입주 날짜라는 창문 하나가 열리자, 매도인이 가장 원하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부정 전제 질문 하나가 누수 이력을 계약 전에 꺼냈습니다. 피은호 씨는 처음보다 3천만 원 낮은 가격에 방수 공사까지 받았고, 매도인은 원하던 3월까지 그 집에 머물 수 있게 됐습니다.

금고를 열고 창문을 닫았을 때

대출 한도와 절박함이 공개되며 매도인의 숫자가 7억 4천에 고정됐습니다. '문제없죠?'라는 질문은 하자를 숨길 출구가 됐고, 입주 후 누수 수리비까지 떠안았습니다.

창문을 열고 금고를 닫았을 때

입주 날짜의 유연함이 매도인의 숨은 필요와 맞물려 가격 조정의 근거가 됐습니다. 누수 이력이 계약 전에 드러나 7억 1천에 방수 공사 포함으로 합의했고, 매도인도 원하던 일정을 얻었습니다.

집을 살 때, 일을 구할 때, 가족과 정할 때

아파트 매매처럼 한 번의 큰 거래라면 금고와 창문의 구분이 가장 분명하게 작동합니다. 다시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상대일수록 금고는 더 단단히 닫아야 합니다.

이직 면접에서는 금고의 내용이 바뀝니다. 현재 연봉과 다른 회사 제안 금액이 금고에, 근무 형태나 입사 가능일처럼 회사가 맞춰줄 수 있는 조건이 창문에 들어갑니다. 부정 전제 질문도 쓸 수 있습니다. "야근이 많은 팀인가요?" 대신 "바쁜 시기엔 보통 몇 시쯤 퇴근하세요?"처럼요.

가족 사이에서는 금고를 너무 단단히 닫으면 숨긴다는 오해를 삽니다. 가족과는 나눠 갖기보다 함께 사는 결정이 대부분이라, 창문을 넓게 여는 쪽이 대체로 낫습니다. 부정 전제 질문도 가족에게 쓰면 추궁처럼 들릴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금고를 닫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의 경계

금고를 닫는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거짓을 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도인이 "대출은 얼마나 나오세요?"라고 직접 물었을 때 "5억밖에 안 나와요"라고 지어내면 그것은 기만입니다. "예산은 시세와 집 상태를 보고 정하려고요"처럼 답을 미루는 것까지가 금고의 범위입니다.

부정 전제 질문에도 선이 있습니다. 연구에서처럼 흔하지 않은 문제를 단정적으로 물으면 질문자가 무례해 보였습니다. "여기 혹시 누수 있었죠?"는 20년 된 집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새 아파트에서는 상대를 의심하는 질문이 됩니다. 집의 연식과 상황에 맞는 문제만 전제해야 합니다.

연구의 범위도 짚어둡니다. 1999년 연구는 설계된 협상 과제를, 2018년 연구는 채용 면담과 업무 행동 공개를 다뤘습니다. 부동산 거래에서 하자 고지는 법적 의무와도 얽혀 있어, 질문 하나에 기대기보다 등기부와 하자 이력 확인을 함께 해야 합니다.

공개할지 말지를 고민하기 전에, 그 정보가 함께 나눌 몫을 키우는지 내 몫을 줄이는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계약서를 접어 가방에 넣은 피은호 씨는 거실 창가로 걸어가 잠시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봤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작은방 베란다 쪽을 한 번 더 돌아봤습니다.

상대가 한 명일 때는 그 사람의 금고와 창문만 살피면 됐습니다. 그런데 명절 계획을 정하는 삼 남매처럼, 세 사람이 똑같이 "우리 집에서 모이자"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저마다 다르다면 어떨까요? 같은 요구 뒤에 숨은 세 개의 다른 이유를 어떻게 하나의 합의로 엮을 수 있을까요?

참고 자료

  • Murnighan, J. K., Babcock, L., Thompson, L., and Pillutla, M. (1999). The information dilemma in negotiations: Effects of experience, incentives, and integrative potential. International Journal of Conflict Management, 10(4), 313–339 — DOI
  • Minson, J. A., VanEpps, E. M., Yip, J. A., and Schweitzer, M. E. (2018). Eliciting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 The effect of question phrasing on deception.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147, 76–93 — 원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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