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7. 위로 여는 범위, 희망 연봉을 두 숫자로 말할 때 갈리는 300만 원

"희망 연봉은 6,500에서 6,800 사이입니다." 소재원 씨가 이 문장을 말하고 3초 뒤, 화면 속 인사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적었습니다. 메모지에 적힌 숫자는 하나뿐이었습니다. 6,500.

이번 회차는 기법부터 꺼내겠습니다. 이름은 '위로 여는 범위'. 숫자 하나 대신 두 개의 숫자를 부르되, 내가 원하는 숫자를 범위의 맨 아래에 놓고 위쪽으로 문을 여는 방식입니다. 범위를 어느 쪽으로 여느냐에 따라 결과가 얼마나 갈리는지는 아래 장면이 보여줍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Ep 06의 끝자리 설계가 숫자 하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법이었다면, 이번 회차는 단단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두 개의 숫자를 다루며 앞 회차와 대비를 이룹니다. 읽고 나면 범위 제안이 왜 어떤 때는 손해고 어떤 때는 이득인지 설명할 수 있고, 내 목표를 지키면서 상대에게 여지를 주는 범위를 직접 설계할 수 있습니다.

책장 앞 화상 통화에서 아래로 열린 범위

원룸 한쪽 벽을 채운 책장 앞, 노트북 카메라 각도를 세 번이나 고쳐 잡은 자리. 7년 차 UX 디자이너 소재원 씨는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처우 협의 화상 통화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화면 반대편에는 이직할 회사의 인사팀장 금나래 씨가 회사 로고가 걸린 회의실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죠.

소재원 씨가 시장 자료와 현재 연봉을 따져 정해둔 목표는 6,800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를 그대로 말하기엔 너무 딱딱해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부드럽게 범위로 말하기로 했죠.

금나래 팀장 희망하시는 연봉 수준을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

소재원 네, 6,500에서 6,800 사이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나래 팀장 알겠습니다. 내부 기준으로 보면 6,500으로 맞춰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범위 안이시니까 괜찮으시죠?

소재원 …네, 괜찮습니다.

"범위 안이시니까"라는 한마디에 소재원 씨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자기 입으로 말한 범위였으니까요. 목표보다 300만 원 낮은 숫자가, 그녀 자신이 허락한 숫자가 되어 계약서에 올라갔습니다.

"범위로 말하면 아래쪽만 듣는다"는 오래된 조언

협상 조언에서 범위 제안은 오랫동안 금기였습니다. 상대는 범위의 가장 유리한 쪽만 들으니 반드시 숫자 하나로 말하라는 거죠. 소재원 씨의 결과만 보면 이 조언이 정확히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다시 보면 문제는 범위를 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범위를 어느 방향으로 열었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목표를 범위의 꼭대기에 두고 아래로 문을 열었습니다.

아래로 연 범위는 스스로 쓴 양보 각서가 된다

"6,500에서 6,800 사이"라는 문장을 대화 구조로 풀어보면, 소재원 씨는 목표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 목표에서 얼마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미리 공개한 셈입니다.

그 결과 범위의 아래쪽 끝이 실질적인 마지노선 고백이 됐습니다. 상대 입장에서는 6,500을 제시해도 거절당할 위험이 없다는 정보를 공짜로 얻은 거죠. 게다가 범위 안의 숫자를 고르면 상대는 요구를 깎은 사람이 아니라 '요청을 들어준 사람'이 됩니다. 금나래 팀장이 "범위 안이시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결국 소재원 씨가 부드럽게 보이려고 얹은 아래쪽 숫자가 협상의 결론이 됐습니다.

범위 제안의 세 가지 방향

목표 숫자를 기준으로 범위를 위쪽으로 넓히면 강화형(bolstering), 목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넓히면 감싸기형(bracketing), 목표를 꼭대기에 두고 아래로 넓히면 물러서기형(backdown) 범위입니다. 소재원 씨가 쓴 "6,500에서 6,800"은 전형적인 물러서기형이었습니다.

같은 범위라도 방향이 결과를 갈랐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Daniel Ames와 Malia Mason은 2015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연구에서 이 오래된 금기를 다시 시험했습니다. 케이터링 업체와의 가격 흥정, 연봉 협상, 중고차 거래 등을 다룬 다섯 개의 연구에서 범위 제안을 방향별로 나눠 비교했습니다.

목표에서 위쪽으로 넓힌 강화형 범위는 숫자 하나를 부른 경우보다 자주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냈고, 상대와의 관계를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목표를 가운데 둔 감싸기형은 숫자 하나보다 결과가 나쁘지 않으면서 더 유연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반면 목표에서 아래로 넓힌 물러서기형은 숫자 하나보다 얻는 것이 적었고, 감싸기형보다 관계상 이득이 더 있지도 않았습니다.

중고차 실험의 한 장면이 특히 눈에 띕니다. 위로 넓힌 범위를 부른 판매자는 숫자 하나를 부른 판매자보다 더 좋은 거래를 했고, 더 부정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범위 대신 더 높은 숫자 하나를 부르라는 지시를 받은 판매자는 거래가 성사됐을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지 못했고, 합의 없이 끝날 가능성은 두 배로 높아졌습니다.

연구진은 이 차이의 일부를 공손함으로 설명했습니다. 범위는 상대에게 선택권을 남기는 말투로 들리기 때문에, 높은 숫자를 포함하고 있어도 무례한 요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중 기준점 (tandem anchoring)

범위의 두 숫자가 동시에 기준점 역할을 한다는 개념입니다. 위쪽 숫자는 상대의 기대를 끌어올리는 정보로, 범위라는 형식은 상대의 체면을 지켜주는 공손함으로 작용합니다. 숫자 하나로는 둘 중 하나만 얻을 수 있지만, 범위로는 둘을 함께 얻을 수 있습니다.

위로 여는 범위, 목표를 바닥에 깔고 문을 위로 낸다

위로 여는 범위를 만드는 순서는 세 단계입니다.

첫째, 목표 숫자를 범위의 아래쪽 끝에 놓습니다. 소재원 씨라면 6,800이 범위의 시작점입니다. 상대가 범위의 아래쪽을 고르더라도 내 목표는 지켜집니다.

둘째, 위쪽 끝은 근거로 설명할 수 있는 높이까지만 엽니다. 연봉이라면 같은 직무의 상위 처우 수준이나 맡게 될 업무 범위가 근거가 됩니다. 근거 없는 위쪽 끝은 공손함이 아니라 허세로 들립니다.

셋째, 범위 뒤에 상대의 판단을 묻는 말을 붙입니다. 범위가 주는 공손함은 '당신이 고를 수 있다'는 메시지에서 나옵니다. 그 메시지를 말로 한 번 더 확인해주는 거죠.

"6,800에서 7,200 사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은 직무 시니어 처우와, 말씀해주신 디자인 시스템 구축 범위까지 고려한 숫자입니다."

"이 범위 안에서 회사 기준으로는 어느 쪽이 가능할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숫자 두 개 중 아래쪽이 내 목표이고, 위쪽은 상대의 기대를 끌어올리는 신호입니다. 상대가 범위 안의 어떤 숫자를 고르든 그것은 내 목표 이상입니다.

같은 화면, 위로 열린 범위

이번에 금나래 팀장이 메모지에 적은 숫자는 7,000이었습니다.

소재원 6,800에서 7,200 사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은 직무 시니어 처우와, 디자인 시스템 구축까지 맡는 범위를 고려했어요. 회사 기준으로는 어느 쪽이 가능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금나래 팀장 디자인 시스템까지 맡아주시는 건 저희도 기대하는 부분이라… 7,000으로 맞춰보겠습니다. 상단은 내부 승인이 필요해서요.

소재원 좋습니다. 7,000으로 진행해주세요.

상대는 범위의 바닥이 아니라 중간을 골랐습니다. 소재원 씨가 범위에 붙인 업무 근거가 위쪽 숫자를 진지하게 고려할 이유가 됐고, 범위라는 형식 덕분에 금나래 팀장은 '깎는 사람'이 아니라 '조율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숫자를 고를 수 있었습니다.

목표를 꼭대기에 두고 아래로 열었을 때

범위의 아래쪽 끝이 마지노선 고백이 됐고, 상대는 "범위 안이시니까"라는 말로 바닥을 골랐습니다. 목표보다 300만 원 낮은 6,500만 원에 합의했고, 반박할 근거마저 스스로 지워버렸습니다.

목표를 바닥에 두고 위로 열었을 때

상대가 범위 중간인 7,000을 골랐고, 목표보다 200만 원 높게 합의했습니다. 높은 숫자를 포함했는데도 대화는 부드럽게 유지됐고, 첫 출근 전부터 관계에 흠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직 처우, 현 직장 연봉 협상, 집안의 돈 이야기

이직 처우 협의처럼 상대가 나를 아직 잘 모르는 자리라면, 위로 여는 범위는 근거와 함께 쓸 때 가장 강합니다. 범위의 위쪽 끝을 설명하는 근거가 곧 나를 소개하는 정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연봉을 협상할 때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상사는 내 성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위쪽 끝을 과하게 열면 자기 평가를 부풀린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때는 위쪽 폭을 좁게 잡고, 구체적인 성과 하나로 그 폭을 뒷받침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가족 사이에서 생활비나 용돈을 정할 때는 위로 여는 범위가 오히려 계산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목표를 가운데 두는 감싸기형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연구에서도 감싸기형은 결과를 크게 잃지 않으면서 유연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위로 여는 범위가 통하지 않는 자리

연구진도 분명히 밝혔듯, 범위 제안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물러서기형 범위는 대부분의 경우 피하는 게 좋습니다. 소재원 씨가 처음에 한 실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회사의 연봉 체계가 직급별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면, 범위의 위쪽 끝이 그 체계를 넘는 순간 공손함의 효과는 사라집니다. 상대에게는 고를 수 없는 선택지를 내민 셈이 되니까요. 위쪽 끝은 상대가 실제로 고를 수 있는 높이 안에 있어야 합니다.

Ep 06의 끝자리 설계와 섞어 쓸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범위의 양 끝을 모두 정밀한 숫자로 말하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는 이 연구들이 직접 다루지 않았습니다. 범위의 형식이 주는 유연함과 정밀함이 주는 단단함이 서로 부딪힐 수 있으니, 범위를 쓸 때는 숫자는 깔끔하게, 근거는 구체적으로 말하는 쪽이 무난합니다.

범위는 약해 보이는 말투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문을 내느냐에 따라 양보 각서도 되고, 공손한 요구도 됩니다.

통화가 끝나고 노트북 화면이 꺼지자, 책장 앞에는 카메라 각도를 맞추느라 쌓아 올린 책 세 권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처우 협의 메일함에는 7,000이라는 숫자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재원 씨에게는 운이 따랐습니다. 상대가 먼저 희망 연봉을 물어봐 준 덕분에 그녀가 먼저 숫자를 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만약 반대로 상대가 먼저, 그것도 터무니없이 낮은 숫자를 던졌다면 그 숫자 위에서 대화를 이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그 숫자를 테이블에서 치워야 할까요?

참고 자료

  • Ames, D. R., and Mason, M. F. (2015). Tandem anchoring: Informational and politeness effects of range offers in social exchang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08, 254–274 — 연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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