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가장 비싼 착각은 '저쪽은 무조건 우리와 반대로 원한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품고 앉는 순간, 협상은 시작도 전에 줄다리기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줄다리기에서는 둘 다 손바닥만 벗겨집니다.
이번 회차는 기법부터 꺼내겠습니다. 이름은 '첫 5분 겹침 찾기'. 날짜든 금액이든 숫자를 놓고 다투기 전에, 처음 5분 동안 서로 걸려 있는 것들을 펼쳐 놓고 실제로 반대인 것과 사실은 같은 것을 먼저 가려내는 방법입니다. 이 5분을 건너뛰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아래 회의실이 보여줍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Ep 11의 장면으로 묻기가 한 사람의 숨은 사정을 꺼내는 법이었다면, 이번 회차는 양쪽이 모두 '우리는 반대편'이라고 믿고 앉은 테이블로 확장해 앞 회차를 심화합니다. 읽고 나면 상대의 이익이 내 이익과 정반대라는 가정이 어떻게 협상 결과를 깎는지 설명할 수 있고, 협상 초반에 그 가정을 깨는 순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화이트보드에 날짜 하나만 적힌 회의
8층 소회의실 화이트보드에는 날짜 하나가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11월 3일. 마케팅팀이 정한 신규 앱 출시일이었고, 그 아래에는 개발팀이 빨간 펜으로 그어놓은 굵은 물음표가 있었습니다.
기유라 매니저 캠페인 광고 집행이 11월 3일로 잡혀 있어서 이 날짜는 못 움직여요.
함서준 리드 그 날짜면 테스트를 절반도 못 합니다. 최소 2주는 밀어야 해요.
기유라 매니저 2주면 캠페인 예산이 날아가요. 일주일이요.
함서준 리드 그럼 열흘로 하죠. 대신 출시 후에 버그 나도 저희 탓 하지 마세요.
출시일은 11월 13일로 정해졌습니다. 마케팅팀은 이미 집행 계약을 마친 광고 일부를 위약금을 물고 미뤄야 했고, 개발팀은 여전히 부족한 테스트 기간을 안고 출시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출시 첫 주, 결제 화면에서 오류가 터졌습니다. 두 팀 모두 원하지 않던 바로 그 결과였습니다.
"중간에서 만나면 공평하다"는 회의실의 상식
일주일과 2주 사이 열흘. 둘 다 조금씩 양보했으니 공평한 타협처럼 보입니다. 부서 간 회의에서 가장 흔하게 나오는 결론의 모양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타협은 두 팀 모두에게 손해였습니다. 마케팅은 날짜를 잃었고, 개발은 품질을 잃었습니다. 중간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좋은 합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중간이 두 사람 모두에게 나쁜 자리일 수도 있으니까요.
날짜 하나에 모든 것을 걸면 반대만 보인다
이 회의를 구조적으로 보면, 두 팀은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두 가지를 가정했습니다.
첫 번째 가정은 '판은 날짜 하나'라는 것입니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것이 날짜뿐이었으니, 대화도 날짜를 당기느냐 미루느냐로만 흘렀습니다. 마케팅이 정말 필요했던 게 '11월 3일에 앱 전체'였는지, '11월 3일에 광고에 보여줄 핵심 기능'이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가정은 '저쪽은 우리와 반대로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케팅은 개발이 일정을 미루고 싶어 한다고 봤고, 개발은 마케팅이 품질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출시 후 결제 오류는 두 팀 모두에게 재앙이었습니다. 버그 없는 출시는 처음부터 두 팀이 똑같이 원하던 것이었죠. 이 공통점은 회의 내내 한 번도 말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버그 나도 저희 탓 하지 마세요"라는 말로, 같은 걱정이 서로를 겨누는 무기가 됐습니다.
고정 파이 오류와 양립 불가 오류
고정 파이 오류(fixed-sum error)는 상대가 얻는 만큼 내가 잃는다고 가정하는 착각입니다. 양립 불가 오류(incompatibility error)는 사실 양쪽이 같은 것을 원하는데도 상대가 반대를 원한다고 믿는 착각입니다. 이 회의의 두 팀은 날짜에서 첫 번째 오류를, 출시 품질에서 두 번째 오류를 동시에 범했습니다.
처음 몇 분에 상대를 알아챈 사람이 더 얻었다
Leigh Thompson과 Reid Hastie는 1990년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에 실린 두 개의 연구에서, 협상자가 상대의 이익을 어떻게 지각하느냐가 결과를 어떻게 바꾸는지 살폈습니다.
대부분의 협상자는 상대의 이익이 자기 이익과 완전히 반대일 거라 예상하며 협상에 들어왔습니다. 협상이 진행되며 함께 얻을 여지를 알아가기도 했는데, 그 깨달음의 대부분은 상호작용의 처음 몇 분 안에 일어났습니다. 상대의 이익을 정확히 파악한 협상자가 더 좋은 성과를 냈고, 이른 단계에서 알아챈 사람이 늦게 알아챈 사람보다 더 높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는 서로의 이익이 완전히 같은 쟁점이 있는데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어정쩡한 합의에 머물렀습니다.
기유라 매니저와 함서준 리드의 회의가 그 마지막 문장 그대로였습니다. 버그 없는 출시라는 완전히 같은 이익이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둘 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 착각을 무엇이 깨는지에 대한 단서는 De Dreu, Koole, Steinel의 2000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연구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협상자 중 일부에게 '어떻게 협상했는지'를 나중에 설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지웠습니다.
협상 과정에 대한 책임을 진 협상자들은 대면 협상 중에 고정 파이 지각이 줄었고, 서로에게 이로운 통합적 합의에 더 많이 도달했습니다. 교환되는 정보의 양을 똑같이 맞춘 실험에서도 이들은 고정 파이 지각을 수정했습니다. 연구진은 협상자들이 고정 파이 지각에 기대는 정도가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과정 책임 (process accountability)
결과가 아니라 결론에 이른 과정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은 사람을 더 정확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처음의 짐작에 기대기보다 실제 정보를 다시 따져보게 합니다.
첫 5분 겹침 찾기, 숫자 전에 칸부터 나누는 순서
첫 5분 겹침 찾기는 세 단계로 진행합니다. 두 연구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지점, 즉 초반에 상대 이익을 정확히 파악할수록 유리하고, 과정을 설명해야 할 때 그 파악이 정확해진다는 결과를 회의 순서로 옮긴 것입니다.
첫째, 처음 5분은 숫자를 금지합니다. 날짜도 금액도 꺼내지 않고, 각자 이 결정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만 적습니다. 마케팅이라면 광고 집행일, 캠페인에 보여줄 화면, 예산 위약금. 개발이라면 테스트 범위, 결제 모듈 안정성, 출시 후 대응 인력.
둘째, 항목마다 세 가지 표시 중 하나를 붙입니다. 진짜 반대인 것, 서로 다르지만 부딪히지 않는 것, 그리고 사실은 같은 것. 이 표시를 붙이는 순간, 날짜 하나로 보이던 판이 여러 칸으로 나뉩니다.
셋째, 결론이 나기 전에 설명할 사람을 정합니다. "이 결정이 어떻게 나왔는지 본부장님께 한 장으로 보고하자"처럼 과정을 설명할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두면, 양쪽 모두 짐작 대신 정보로 판단할 이유가 생깁니다.
"날짜 얘기 전에 5분만, 각자 이 출시에 뭐가 걸려 있는지부터 적어볼까요?"
"이건 우리 둘 다 원하는 거네요. 여기엔 같은 표시 할게요."
"오늘 정한 건 왜 이렇게 정했는지까지 같이 정리해서 위에 올리죠."
이제 그 회의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같은 화이트보드, 칸이 나뉜 출시일
5분 뒤 화이트보드에는 날짜 대신 여덟 줄의 항목이 적혔고, 그중 두 줄에 '같음' 표시가 붙었습니다.
함서준 리드 결제 모듈 안정성, 이건 마케팅 쪽에도 같은 표시 붙이셨네요.
기유라 매니저 당연하죠. 광고 보고 들어왔는데 결제가 안 되면 그게 제일 최악이에요. 그런데 광고에 보여줄 건 사실 '사진 꾸미기' 기능 하나예요.
함서준 리드 그 기능은 테스트가 거의 끝났어요. 그럼 11월 3일엔 사진 꾸미기만 무료로 먼저 열고, 결제는 2주 뒤에 여는 건 어때요?
기유라 매니저 그럼 광고 일정 그대로 가고, 결제 오픈 때 2차 푸시 알림까지 쓸 수 있겠네요.
마케팅은 날짜를 지켰고, 개발은 결제 모듈에 2주를 벌었습니다. 열흘짜리 타협보다 두 팀 모두 더 많은 것을 얻은 합의였죠. 이 해법은 날짜를 두고 밀고 당기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다가, 칸을 나누자마자 보였습니다.
날짜 하나로 다퉜을 때
열흘 연기라는 중간값에 합의했지만, 마케팅은 위약금을 물고 개발은 부족한 테스트로 출시했습니다. 두 팀이 똑같이 피하고 싶던 결제 오류가 출시 첫 주에 터졌고, 서로를 향한 책임 공방만 남았습니다.
첫 5분에 칸을 나눴을 때
출시일은 그대로 지키면서 결제 오픈만 2주 뒤로 나누는 해법이 나왔습니다. 공통 걱정이었던 결제 안정성이 확보됐고, 마케팅은 2차 알림이라는 덤까지 얻었습니다.
회사 안, 거래처와, 집 안에서 칸 나누기
같은 회사 안의 부서 간 협상은 첫 5분 겹침 찾기가 가장 잘 통하는 자리입니다. 결국 같은 조직의 성과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같음' 표시가 붙는 칸이 생각보다 많고, 과정을 설명할 상급자도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회사 밖 거래처와는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걸려 있는 항목을 모두 적어 보여주는 것은 내 사정을 상대에게 공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거래처와는 상대의 항목을 먼저 묻고, 내 쪽은 '같음'이 될 만한 항목부터 꺼내는 순서가 안전합니다.
가족 사이에서는 '같음' 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다툼이 날짜나 금액 하나에 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절에 어느 집을 먼저 갈지 다툴 때도, 두 사람 모두 '양가 부모님이 서운하지 않은 것'을 원한다는 칸을 먼저 칠하면 대화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칸을 나눠도 겹치는 것이 없을 때
모든 협상에 숨은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정된 예산 하나를 두 팀이 나눠야 하는 상황이라면, 칸을 아무리 나눠도 결국 진짜 반대인 칸이 남습니다. 첫 5분 겹침 찾기는 그런 칸을 없애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칸이 판 전체가 아니라 판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5분이 30분이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항목 목록이 끝없이 늘어나면 정작 결정은 미뤄지고, 회의는 서로의 불만 목록을 읽는 자리가 됩니다. 항목은 각자 다섯 개 안쪽, 시간은 정말 5분 안쪽이 좋습니다.
연구의 범위도 짚어둡니다. 1990년 연구와 2000년 연구는 모두 이익 구조가 미리 설계된 모의 협상 과제를 썼습니다. 실제 회사 안에서는 무엇이 '같음'인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숫자를 금지하고 항목에 표시를 붙이는 회의 순서는 연구 결과 위에서 이 채널이 구성한 적용입니다.
상대가 반대편에 앉아 있다고 해서 반대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테이블의 모양이 대립을 닮았을 뿐, 그 위에 놓인 것들은 대부분 겹쳐 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화이트보드는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빨간 물음표가 있던 자리에는 파란 펜으로 그은 화살표 두 개가 남았습니다. 하나는 11월 3일로, 하나는 그로부터 2주 뒤로. 오후 햇살이 그 두 화살표 위를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같은 회사 사람끼리라 서로 걸려 있는 것을 다 꺼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매도인과 아파트 가격을 두고 마주 앉았다면, 내 사정을 이만큼 펼쳐 보이는 게 정말 안전할까요?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서 멈춰야 할까요?
참고 자료
- Thompson, L., and Hastie, R. (1990). Social perception in negotiation.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47(1), 98–123 — 원문 정보
- De Dreu, C. K. W., Koole, S. L., and Steinel, W. (2000). Unfixing the fixed pie: A motivated information-processing approach to integrative negotia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9(6), 975–987 — 원문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