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3. 돌려 말한 부탁이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이유, 송장 붙이기 화법

APER 대화유형 진단 › 네 글자를 해부하다 › 직구와 힌트, 같은 말이 다르게 도착하는 이유 · 초급

돌려 말하는 사람이 오해받는 이유는, 돌려 말해서가 아닙니다.

지난 회차에 남긴 질문부터 답하겠습니다. "다들 설엔 바쁘지 않나?"는 질문일까요, 거절일까요. 답은 이렇습니다. 말한 사람조차 그 말이 어느 쪽으로 들렸는지 모를 수 있다는 것.

이번 회차의 결론을 먼저 꺼내 두죠. 돌려 말하기는 포장입니다. 포장은 죄가 없습니다. 문제는 포장만 하고 송장을 붙이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APER의 세 번째 축, 말하는 방식(E)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는 직접(D)과, 상대와 분위기를 보며 완곡하게 하는 돌려(S)를 가릅니다.

이번 회차의 학습 목표

  • 힌트가 도착하지 못하는 세 가지 구조를 구분한다
  • 완곡함을 지키면서 뜻을 전하는 송장 붙이기 화법을 익힌다
  • 직접 말하는 D가 공격으로 들리지 않는 순서를 익힌다

Ep 02가 언제 답하느냐를 다뤘다면, 이번 회차는 어떤 모양으로 답하느냐로 이어집니다. 도착 시간이 맞아도 모양이 어긋나면 내용이 바뀝니다.

테트리스가 된 냉장고

맞벌이 3년 차 변지수의 집 부엌. 냉장고 문을 열면 반찬통이 층층이 탑을 이루고 있습니다. 맨 아래 칸에는 뚜껑에 날짜가 적힌 통이 두 주째 그대로고요.

토요일 오전, 어머니 육정란 씨가 아이스박스를 들고 현관에 들어섭니다. 이번에도 일곱 가지입니다.

변지수
"엄마, 우리 냉장고 요즘 진짜 테트리스야. 지난번 거 아직 다 못 먹었어."

육정란
"그러니까 김치냉장고 하나 들이라니까. 엄마가 보태 줄게. 저기 자리 되겠네."

변지수
(웃으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는 벌써 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수는 말을 삼켰죠.

두 주 뒤, 상한 시금치무침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던 날 저녁.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이번 주에 갈비 재 놨다."

변지수
"엄마, 이제 반찬 좀 그만 보내. 솔직히 반은 버려."

육정란
"버린다고?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엄마는 좋다는 줄 알았지."

수화기 너머로 몇 초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힌트는 왜 냉장고 이야기로 도착했을까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가족끼리는 돌려 말해도 다 안다고. 반대로 할 말은 그냥 하라고도 하죠. 지수는 처음엔 앞의 말을 믿었고, 마지막엔 뒤의 말을 따랐습니다. 둘 다 실패했고요.

이 부엌에서 일어난 일을 구조로 나눠 보면 세 단계가 보입니다.

첫째, 해석하는 일이 듣는 사람에게 넘어갔다

힌트는 뜻을 맞히는 일을 상대에게 맡기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대개 자기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반찬을 사랑의 표현으로 여기는 어머니에게 "냉장고가 꽉 찼다"는 '반찬이 많다'가 아니라 '냉장고가 작다'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해법도 김치냉장고였죠.

둘째, 말한 사람만 뜻이 투명하다고 믿었다

지수에게 그 말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지난번 거 다 못 먹었다고까지 했으니까요. 문제는 그 분명함이 지수 머릿속에만 있었다는 겁니다.

투명성 착각

자기 의도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의도가 말에 실제보다 훨씬 또렷하게 드러난다고 믿는 경향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 뜻을 알기 때문에 문장의 모호함을 잘 알아채지 못합니다.

셋째, 미뤄진 직구에는 이자가 붙었다

전달되지 않은 힌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쌓입니다. 그러다 결국 한꺼번에, 가장 거친 모양으로 나오죠. "솔직히 반은 버려"처럼요.

이 문장은 반찬의 양이 아니라 어머니의 정성을 겨냥한 말로 들립니다. 부탁 하나가 관계 전체에 대한 평가로 번진 셈입니다.

어머니의 대답도 짚어 봐야 합니다. "진작 말을 하지"는 직접 말하는 D다운 정확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수에게는 '네가 잘못했다'로 들렸습니다. 사실이 맞아도, 감정보다 판정이 먼저 나오면 공격이 됩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을 과신한다

시카고대의 보아즈 케이사르와 앤 헨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로 해석되는 문장을 주고, 그중 한 가지 뜻으로 상대에게 전달하게 했습니다.

말한 사람들은 상대가 실제보다 더 자주 자기 뜻을 알아들었다고 일관되게 과대평가했습니다. 그 문장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요.

흥미로운 건, 말한 사람의 의도를 전해 들은 제3자는 이런 과대평가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착각을 만든 건 말하는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 돌려 말하지 않으면 될까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스티븐 핑커 연구팀은 돌려 말하기가 비효율적인데도 거의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거절당해도 물러설 수 있는 여지, 즉 '그 뜻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관계입니다. 말은 정보만 나르지 않고,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도 함께 협상합니다. 정으로 주고받는 어머니와 딸 사이에서 "그만 보내"라는 직구는, 정보로는 맞아도 관계의 문법으로는 어긋납니다.

그럴듯한 부인 가능성

돌려 한 말은 상대가 받아들이면 뜻이 통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물러설 수 있습니다. 거절의 비용을 줄여 주는 장치지만, 그만큼 뜻이 전달되지 않을 위험도 함께 집니다.

결국 S의 포장은 관계를 지키려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지킬 건 지키고, 놓치는 것만 막으면 됩니다.

송장 붙이기, 포장은 두고 내용물만 적는다

택배 상자는 포장되어 있어도 받는 사람이 헤매지 않습니다. 겉에 송장이 붙어 있으니까요. 돌려 말한 문장에도 송장 한 줄을 붙이면 됩니다.

송장 붙이기의 구성

포장 · 원래 하던 완곡한 문장은 그대로 둔다
"우리 냉장고 요즘 진짜 테트리스야."

송장 · "그러니까 내 말은" 뒤에 구체적인 부탁을 적는다
"반찬은 한 달에 한 번, 두세 가지면 좋겠다는 거야."

취급 주의 · 관계를 건드리는 해석을 미리 막는다
"엄마 반찬이 싫어서가 아니라, 버리는 게 아까워서."

송장은 부탁을 기록에 남깁니다. 취급 주의는 핑커가 말한 '관계의 문법'을 지켜 줍니다. 완곡함이 주던 보호막은 남기고, 해석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부분만 덜어 내는 거죠.

토요일 오전의 부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변지수
"엄마, 우리 냉장고 요즘 진짜 테트리스야. 그러니까 내 말은, 반찬은 한 달에 한 번, 두세 가지면 좋겠다는 거야."

변지수
"엄마 반찬이 싫어서가 아니라, 남겨서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워서 그래."

육정란
"아이고, 그럼 그렇다고 하지. 그럼 너희 제일 잘 먹는 게 뭐야? 그것만 해 올게."

결과 비교

힌트만 주다 직구로 터뜨렸을 때

부탁은 김치냉장고로 잘못 배달됐고, 두 주 뒤 "반은 버려"라는 문장으로 다시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정성을 부정당한 기분을, 지수는 진작 말 못 한 탓을 들은 기분을 안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송장을 붙였을 때

어머니가 먼저 "뭘 제일 잘 먹느냐"고 물었습니다. 반찬을 줄이자는 부탁이 반찬을 더 잘 맞추자는 대화로 바뀐 겁니다. 취급 주의 한 줄 덕분에 어머니는 거절이 아니라 주문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직구를 던지는 D에게 필요한 완충재

S에게 송장이 필요하다면, D에게는 완충재가 필요합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순서만 바꾸면 됩니다. 판정보다 내 감정을 먼저, 그다음에 부탁.

어머니의 "진작 말을 하지"를 이렇게 바꿔 볼 수 있습니다. "몰랐네. 엄마는 좋아하는 줄 알았어. 말해 줘서 다행이다." 들어 있는 사실은 같은데, 화살이 지수를 향하지 않습니다.

상황 D가 미끄러지는 곳 S가 미끄러지는 곳
1:1사실을 판정처럼 말함힌트만 쌓다가 한꺼번에 터짐
모임여럿 앞에서의 직언이 망신으로 남음농담에 실은 뼈를 아무도 못 알아챔
회의반대 의견이 사람에 대한 비판으로 들림"검토해 보면 어떨까요"가 반대로 접수되지 않음
단톡방표정 없는 짧은 문장이 화난 것처럼 읽힘이모티콘에 묻은 불만이 그냥 묻힘

회의에서 S의 송장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 방향도 검토해 보면 어떨까요" 뒤에 "제 의견은 현재 안에 반대입니다"를 붙이지 않으면, 회의록에는 아무 반대도 남지 않습니다.

송장을 붙이지 않는 편이 나은 순간

상대의 체면이 여러 사람 앞에 걸려 있을 때는 포장만 두는 편이 낫습니다. 송장은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붙여도 늦지 않습니다.

상대가 이미 힌트를 정확히 알아들었다면 송장은 사족입니다. 같은 부탁을 두 번 말하면, 재촉이나 불신으로 들릴 수 있죠.

상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홀트그레이브스의 연구에서 한국인은 미국인보다 돌려 말하는 경향이 강했고, 남의 말에서 숨은 뜻을 찾는 경향도 강했습니다. 숨은 뜻을 잘 읽는 사람에게는 포장만으로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다만 이건 집단의 평균입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세대와 역할에 따라 숨은 뜻을 찾는 정도는 크게 다르고, 지수의 어머니처럼 말을 글자 그대로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케이사르의 실험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리 주어진 모호한 문장을 읽게 한 실험이라, 일상의 힌트에 그대로 옮기려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도 방향은 분명합니다. 내 말이 통했다는 확신은, 말한 사람이 가장 믿기 어려운 판단입니다.

내 말하는 방식은 어느 쪽일까

APER 진단 결과의 E축 점수와 상황별 변화 지도를 함께 보세요. 가족 앞에서는 S, 회의에서는 D가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APER 진단 시작하기 →

그날 오후, 어머니는 빈 아이스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습니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송장까지 붙였는데 상대 마음에 작은 생채기가 남았다면요. 지수는 그날 밤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할까요, 아니면 며칠 두었다가 다음 방문 때 꺼내야 할까요.

참고 자료

  • Keysar, B., and Henly, A. S. (2002). Speakers' overestimation of their effectiveness. Psychological Science, 13(3), 207–212. 원문 보기
  • Pinker, S., Nowak, M. A., and Lee, J. J. (2008). The logic of indirect speech.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5(3), 833–838. 원문 보기
  • Holtgraves, T. (1997). Styles of language use: Individual and cultural variability in conversational indirectnes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애드센스 본문 상단

본문 중간 연관 글

애드센스 본문 중단

상황별 aper 진단도구

연관글 목록

팔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