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석 팀장이 화면에 띄운 4분기 업무표에는 빈칸이 세 개 있었습니다. 신규 고객사 온보딩, 월간 보고서 자동화, 주말 박람회 부스 운영 두 번. 그 빈칸을 채워야 할 사람은 계민혁 대리와 구하린 사원 두 명이었습니다.
회의는 20분 만에 끝났습니다. 모든 업무가 공평하게 반씩 나뉘었고, 둘은 서로에게 한 번씩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기 내내, 두 사람 모두 자기가 가장 피하고 싶던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세 번째 국면에서 상대의 숨은 사정을 꺼내는 법을 익혔다면, 이번 회차부터는 그렇게 꺼낸 사정을 재료로 판을 바꾸는 네 번째 국면에 들어가며 앞 국면을 심화합니다. 읽고 나면 안건마다 반씩 양보하는 방식이 왜 모두를 손해 보게 만드는지 설명할 수 있고, 양보를 맞바꿈으로 바꾸는 한 문장을 직접 만들 수 있습니다.
빈칸 세 개를 반씩 나눈 회의
하태석 팀장은 빈칸을 하나씩 짚어가며 물었습니다.
하태석 팀장 박람회부터 정하죠. 두 번인데 누가 맡을래요?
구하린 주말이라… 그래도 제가 한 번은 할게요.
계민혁 그럼 나머지 한 번은 제가 할게요.
하태석 팀장 좋아요. 온보딩은요? 고객사 미팅이 저녁에 자주 잡힐 거예요.
계민혁 저녁이면 저는 좀 어려운데… 같이 나눠서 하는 건 어떨까요?
하태석 팀장 그럼 온보딩도, 자동화도 둘이 반씩 나눠서 해요. 공평하게.
계민혁 대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저녁 미팅에 끌려가며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놓쳤습니다. 구하린 사원은 대학원 주말 수업을 하루 빠지고 박람회 부스를 지켰습니다. 그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보고서 자동화는 반쪽짜리가 됐고, 결과물은 둘의 손을 번갈아 거치며 어정쩡하게 끝났습니다.
"하나씩 공평하게 나누면 아무도 불만이 없다"는 분배법
하태석 팀장의 방식은 많은 조직에서 쓰는 정석입니다. 업무마다 똑같이 나누면 누구도 더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없고, 누구도 덜 했다고 비난받지 않습니다. 두 사람도 서로 한 번씩 양보했으니 관계도 좋게 유지되는 듯했죠.
하지만 공평하게 나눈 결과는 공평하게 손해 본 결과였습니다. 두 사람이 업무마다 두는 무게가 전혀 달랐는데, 그 차이가 분배에 한 번도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건마다 반씩 양보하면 무게의 차이가 사라진다
회의가 끝난 뒤에야 드러난 두 사람의 사정은 이랬습니다. 계민혁 대리에게 가장 무거운 것은 평일 저녁 6시 퇴근이었습니다. 반대로 주말은 배우자가 아이를 볼 수 있어 오히려 괜찮았죠. 구하린 사원에게 가장 무거운 것은 주말 대학원 수업이었고, 가장 원하는 것은 데이터 업무 경력이 쌓이는 보고서 자동화였습니다. 평일 야근은 크게 상관없었습니다.
이 사정을 놓고 보면 회의의 구조적 실수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안건별 타협입니다. 업무를 하나씩 떼어 각 업무 안에서 중간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계민혁 대리는 가장 피하고 싶은 저녁 미팅의 절반을, 구하린 사원은 가장 피하고 싶은 주말의 절반을 떠안았습니다. 각자 무게가 가장 큰 곳에서 손해를 본 거죠.
둘째, 대가 없는 양보입니다. "제가 한 번은 할게요"는 착한 말이지만,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양보가 그냥 양보로 끝나면, 그 양보는 다른 업무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탐색할 기회까지 함께 닫습니다.
로그롤링 (logrolling)
여러 안건이 있을 때, 나에게 덜 중요한 안건에서 양보하고 그 대신 나에게 더 중요한 안건에서 얻는 교환 방식입니다. 두 사람이 안건마다 두는 무게가 다를 때, 안건별로 반씩 나누는 것보다 둘 모두에게 더 큰 이익을 남깁니다.
맞바꾸는 제안을 먼저 낸 쪽이 더 얻었지만, 사람들은 잘 내지 않았다
Moran과 Ritov는 2002년 Journal of Behavioral Decision Making에 실린 연구에서 협상 초반 제안의 구성이 결과를 어떻게 바꾸는지 살폈습니다.
첫 제안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그 제안의 전체 가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최종 합의에 영향을 줬습니다. 첫 제안은 안건마다 기준점을 만들었고, 반대 제안은 그 구성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덜 중요한 안건을 내주고 중요한 안건을 얻는 맞바꿈 제안은 그 제안을 낸 사람의 이익을 높였고, 양쪽의 공동 이익도 키웠습니다. 다만 이런 제안이 상대에게 꼭 더 매력적으로 평가된 것은 아니었고, 상대의 '한쪽이 얻으면 한쪽이 잃는다'는 믿음을 바로 깨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유리한 제안을 잘 하지 않을까요. Ritov와 Moran은 2008년 같은 학술지에 실린 후속 연구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한 안건에서 상대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내주면서 전체 가치는 지키는 제안이 협상 결과를 개선했지만, 사람들은 이런 제안을 드물게 했고, 과제에 익숙해져도 그 빈도는 늘지 않았습니다. 연구진은 손실 회피와 안건별 기준점이 사람들이 내놓는 제안의 종류를 좁힌다고 설명했습니다.
손실 회피 (loss aversion)
같은 크기라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크게 느끼는 경향입니다. 협상에서는 한 안건을 통째로 내주는 것이 다른 안건에서 얻는 것보다 더 아프게 느껴져, 맞바꿈이 유리한데도 각 안건에서 조금씩만 물러서는 타협을 고르게 만듭니다.
계민혁 대리와 구하린 사원이 박람회를 한 번씩 나눈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박람회 두 번을 통째로 맡는 것은 큰 손해처럼 느껴졌고, 그 대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맞바꿈 한 문장, 양보에 '대신'을 붙이는 법
이 채널은 이 기법을 '맞바꿈 한 문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양보를 꺼낼 때 반드시 그 뒤에 '대신'으로 이어지는 요청을 붙여, 양보 하나를 교환 하나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세 단계로 진행합니다.
첫째, 업무마다 내 무게를 매깁니다. 꼭 필요한 것, 있으면 좋은 것, 없어도 되는 것. 상대의 무게는 Ep 11에서 다룬 장면으로 묻기로 확인합니다.
둘째, 내가 가볍게 여기는 것을 통째로 내놓습니다. 반씩 쪼개지 않고 한 덩어리로 내놓아야 상대에게 줄 수 있는 크기가 생깁니다. 이 단계가 손실 회피 때문에 가장 망설여지는 지점입니다.
셋째, 같은 문장 안에 '대신'을 붙입니다. 양보와 요청을 한 호흡에 말해야 그 양보가 선물이 아니라 교환의 절반으로 들립니다.
"박람회 두 번은 제가 다 맡을게요. 대신 저녁 미팅이 있는 온보딩은 하린 씨가 맡아주면 좋겠어요."
"온보딩 미팅 자료는 제가 낮에 다 정리해둘게요. 그건 제가 가져갈 수 있어요."
"자동화는 하린 씨가 하고 싶어 했으니까 통째로 가져가는 게 어때요?"
첫 문장이 맞바꿈의 뼈대이고, 나머지 두 문장은 상대가 받는 몫을 더 크게 만들어 교환을 단단하게 합니다. 어느 문장에도 "제가 양보할게요"라는 말은 없습니다.
같은 업무표, 통째로 바꾼 빈칸
이번에는 회의가 15분 만에 끝났고, 두 사람 모두 회의실을 나서며 웃고 있었습니다.
하태석 팀장 박람회부터 정하죠. 두 번인데 누가 맡을래요?
계민혁 박람회 두 번은 제가 다 맡을게요. 대신 저녁 미팅이 있는 온보딩은 하린 씨가 맡아주면 좋겠어요. 미팅 자료는 제가 낮에 다 정리해둘게요.
구하린 정말요? 저 주말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저녁 미팅은 괜찮아요.
계민혁 자동화도 하린 씨가 하고 싶어 했으니까 통째로 가져가요.
하태석 팀장 둘 다 괜찮으면 그렇게 정리하죠. 깔끔하네요.
계민혁 대리는 평일 저녁을 모두 지켰고, 구하린 사원은 주말을 모두 지키면서 원하던 자동화 업무를 온전히 맡았습니다. 각자가 가볍게 여기던 것을 통째로 내주자, 서로가 무겁게 여기던 것을 통째로 얻었습니다.
업무마다 반씩 나눴을 때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의 절반을 떠안았습니다. 계민혁 대리는 하원 시간을, 구하린 사원은 대학원 수업을 놓쳤고, 원하던 자동화 업무는 반쪽짜리가 됐습니다.
맞바꿈 한 문장을 썼을 때
각자 가장 지키고 싶던 시간을 온전히 지켰고, 구하린 사원은 원하던 업무를 통째로 맡았습니다. 회의는 더 짧게 끝났고, 두 사람 모두 손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료 사이, 거래처 사이, 부부 사이의 맞바꿈
동료 사이의 업무 분배라면 맞바꿈 한 문장은 팀장 앞에서 꺼내는 편이 좋습니다. 결정권자가 함께 듣고 있으면 교환이 공식적인 배분이 되고, 나중에 "왜 너만 주말을 다 해?" 같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거래처와의 협상에서는 '대신' 뒤에 붙이는 요청이 계약서에 남는 조건이어야 합니다. 말로만 오간 맞바꿈은 담당자가 바뀌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의 집안일 분담에서는 '대신'이라는 말이 계산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같은 구조를 "나는 설거지가 차라리 편하니까 그거 다 할게, 너는 빨래 개는 게 낫지?"처럼 서로의 무게를 확인하는 말투로 바꾸면 거래가 아니라 배려로 들립니다.
맞바꿀 것이 없을 때, 맞바꾸면 안 될 때
맞바꿈은 두 사람이 안건마다 두는 무게가 다를 때만 작동합니다. 두 사람 모두 평일 저녁이 가장 중요하고 주말도 똑같이 싫다면, 통째로 바꿀 재료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맞바꿈 대신 다른 기준으로 나누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무게를 짐작으로 매기는 것도 위험합니다. 계민혁 대리가 구하린 사원이 저녁 미팅을 괜찮아할 거라고 확인 없이 믿었다면, 그 맞바꿈은 상대에게 일방적인 떠넘기기가 됐을 겁니다. 무게는 반드시 상대의 입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연구의 범위도 짚어둡니다. 두 연구 모두 안건마다 점수가 정해진 모의 협상 과제였고, 무게의 차이가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실제 직장에서는 업무의 무게가 시간이 지나며 바뀌기도 하고, 맞바꾼 업무 중 하나가 예상보다 커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기 중간에 한 번 다시 확인하는 자리를 미리 잡아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양보는 혼자 하면 손해고, '대신'을 붙이면 교환이 됩니다. 반씩 나누는 공평함보다 통째로 바꾸는 공평함이 둘 모두를 더 멀리 데려갑니다.
회의가 끝나고 계민혁 대리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시계는 오후 5시 50분. 그는 외투를 걸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의 등 뒤로 사무실 창밖 노을이 길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업무가 세 개였기에 맞바꿀 재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래처와의 협상처럼 테이블 위에 가격 하나만 놓여 있다면 어떨까요? 맞바꿀 두 번째 조건이 처음부터 없어 보일 때, 그 조건은 어디서 찾아와야 할까요?
참고 자료
- Moran, S., and Ritov, I. (2002). Initial perceptions in negotiations: Evaluation and response to 'logrolling' offers. Journal of Behavioral Decision Making, 15(2), 101–124 — DOI
- Ritov, I., and Moran, S. (2008). Missed opportunity for creating value in negotiations: Reluctance to making integrative gambit offers. Journal of Behavioral Decision Making, 21(4), 337–351 — D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