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네 시, 본부장실 문이 닫혔습니다. 방수진 본부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죠. 다음 달부터 신규 서비스 TF로 가줬으면 좋겠다고. 기간은 여섯 달, 수당은 따로 책정하겠다고.
엄태경 대리는 3초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3초 동안 이미 협상은 끝나 있었습니다.
이 글의 학습 목표
Ep 00에서 협상은 숫자가 나오기 직전의 한마디에서 기운다고 했습니다. 이번 회차는 그보다 한 걸음 더 앞, 한마디를 고르기 전 머릿속에서 무엇이 숫자를 끌어내리는지를 보완합니다. 읽고 나면 '그래도 나한테는 이게 있으니까'라는 생각이 왜 내 요구를 깎는지 설명할 수 있고, 그 생각을 가리고 목표에서 출발하는 첫 마디를 만들 수 있습니다.
3초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
엄태경 대리가 지금 있는 팀은 다음 분기에 인원이 줄어듭니다. 남아 있어도 수당은 없고, 승진 심사에서 내세울 프로젝트도 마땅치 않습니다. TF 제안을 거절하면 그는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계산은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안 가면 0원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받으면 이득이다.
방수진 본부장 엄 대리 생각은 어때요? 수당은 얼마 정도면 되겠어요?
엄태경 대리 아, 저는… 월 20만 원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방수진 본부장 좋아요. 그렇게 하죠.
대답은 1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엄 대리는 그 속도를 칭찬으로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경고였습니다. 상대가 아무 조정 없이 즉시 받아들인 숫자는 대개 상대가 준비한 범위의 아래쪽에 있다는 뜻이니까요. 두 달 뒤, 다른 부서에서 온 TF 동료의 수당이 그보다 두 배 이상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대안이 하나라도 있으면 든든하다"는 믿음
협상에 대해 가장 흔히 듣는 조언이 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두라, 다른 선택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덜 불리하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결렬됐을 때 갈 곳을 알아두면 터무니없는 조건을 거절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대안을 어디에 쓰느냐입니다. 엄 대리는 '남으면 0원'이라는 대안을 거절의 기준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요구의 기준으로 썼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숫자는 바닥에서 출발했습니다.
협상 결렬 시 대안 (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의 약자로, Fisher와 Ury가 『Getting to Yes』에서 정리한 용어입니다. 이 협상이 깨졌을 때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지를 뜻합니다. 엄 대리에게는 '현재 팀 잔류'가 이것이었고, 그 가치가 낮았다는 점에서 '약한 대안'에 해당합니다.
약한 대안을 떠올린 순간 숫자는 바닥에 묶인다
이 장면을 구조적으로 보면 세 단계가 연달아 일어납니다.
먼저 기준점 고정입니다.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숫자가 0원이었고, 이후의 모든 판단이 그 숫자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다음은 부족한 조정입니다. 사람은 출발점에서 위로 올라가긴 하지만, 충분히 멀리 가기 전에 멈춥니다. 0에서 20까지 오른 것만으로 꽤 많이 올렸다고 느끼는 거죠.
마지막은 판단 기준의 뒤바뀜입니다. 원래 물어야 할 질문은 '이 일은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였습니다. 그런데 엄 대리가 실제로 답한 질문은 '안 가는 것보다 나은가'였습니다. 질문이 바뀌면 답의 크기도 바뀝니다.
기준점 효과 (anchoring)
Tversky와 Kahneman은 1974년 Science 논문에서 사람들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쓰는 세 가지 판단 지름길을 정리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주어진 기준값에서 출발해 조정하는 방식으로, 대체로 효율적이지만 체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오류를 낳는다고 설명했습니다. 협상에서는 처음 떠올린 숫자가 이 기준값 역할을 합니다.
대안이 아예 없던 사람들이 더 높이 불렀다
2015년 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Schaerer, Swaab, Galinsky의 연구는 이 직관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안이 전혀 없는 것보다 약한 대안이라도 있는 쪽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이 연구에서 약한 대안은 낮은 기준점이 되어 첫 제안의 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반면 대안이 없는 협상자는 스스로 힘이 약하다고 느끼면서도 더 높은 첫 제안을 내고 더 나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차이가 첫 제안을 거쳐 생긴다는 점을 확인했고, 힘이 있다는 느낌보다 기준점의 영향이 더 클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더 실용적인 발견은 그다음입니다. 같은 연구에서 약한 대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목표 가격에 집중하도록 했더니, 대안에 집중한 사람보다 더 높은 첫 제안을 내고 더 좋은 합의를 얻었습니다. 대안을 없앨 수는 없어도, 그 대안이 기준점이 되지 않게 시선을 옮길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엄 대리에게 필요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닥 가리기, 숫자를 목표선에서 출발시키는 법
이 채널에서는 이 기법을 '바닥 가리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약한 대안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따로 적어두고, 첫 마디를 고르는 순간에는 시야에서 가리는 겁니다. 순서는 세 단계입니다.
첫째, 바닥은 종이에 따로 적습니다. '이 아래면 거절한다'는 선은 협상 내내 품고 있되, 그 선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바닥은 퇴장을 판단하는 용도로만 씁니다.
둘째, 목표선을 일의 무게로 세웁니다. 엄 대리라면 여섯 달 동안 늘어날 업무 시간, 이 TF가 성공했을 때 회사가 얻는 것, 그 과정에서 포기하는 것들을 먼저 따져야 했습니다. '안 가면 0원'은 이 계산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셋째, 첫 마디는 목표선에서 시작합니다. 근거를 한 줄 붙이면 숫자가 감이 아니라 계산으로 들립니다.
"TF 업무량을 따져봤는데, 주당 열 시간 정도 늘어날 것 같아서 월 60만 원 선을 생각했습니다."
"이 일이 잘됐을 때 팀에 돌아오는 걸 생각하면, 저는 이 정도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한 기준을 먼저 말씀드리고, 본부장님 생각을 듣겠습니다."
세 문장 모두 '안 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대화의 기준을 '내 처지'에서 '이 일의 가치'로 옮겨놓고, 상대가 그 기준 위에서 숫자를 조정하게 만듭니다.
같은 본부장실, 다른 첫 마디
이번에는 본부장이 즉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변화였죠.
엄태경 대리 업무량을 따져보니 주당 열 시간쯤 늘 것 같아서, 월 60만 원 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수진 본부장 음, 예산이 빠듯해서요. 45만 원까지는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엄태경 대리 그럼 50만 원으로 하고, 석 달 뒤 성과 보고 때 한 번 다시 보면 어떨까요?
방수진 본부장 좋아요, 그렇게 정리하죠.
본부장이 처음 꺼낸 45만 원은 엄 대리가 처음 불렀던 20만 원의 두 배가 넘습니다. 협상의 중간 지점이 '0과 20 사이'에서 '45와 60 사이'로 통째로 이동한 겁니다.
바닥에서 출발했을 때
본부장이 1초 만에 수락했고, 협상은 시작도 전에 끝났습니다. 엄 대리는 조정할 기회를 스스로 없앴고, 나중에 같은 일을 하는 동료와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TF 업무에 대한 의욕까지 잃었습니다.
목표선에서 출발했을 때
본부장이 즉답 대신 반대 제안을 내놓으며 실제 협상이 열렸습니다. 업무량이라는 근거가 대화의 기준이 되었고, 엄 대리는 처음 숫자의 2.5배를 받으면서 석 달 뒤 재검토라는 조건까지 테이블에 올렸습니다.
상사 앞, 거래처 앞, 가족 앞에서 달라지는 것
상대가 상사일 때는 목표선의 근거를 업무량이나 성과처럼 조직의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제가 이 정도는 받아야죠"보다 "이 업무의 무게를 이렇게 계산했습니다"가 위계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거래처나 고객 앞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단순해집니다. 관계보다 조건이 앞서는 자리이기 때문에 목표선을 더 분명하게 꺼내도 무리가 적습니다.
가족 사이라면 숫자를 앞세우는 순간 계산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때는 바닥 가리기의 원리만 가져옵니다. '이것만 돼도 다행'이라는 생각 대신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가'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거죠. 금액이 아니라 원하는 상태를 먼저 말하는 방식입니다.
바닥 가리기가 통하지 않는 순간
가린다는 것과 잊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바닥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면, 협상이 길어졌을 때 그 아래 조건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바닥은 첫 마디에서만 가리고, 결정의 순간에는 반드시 꺼내 봐야 합니다.
연구의 범위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실험들은 가격 하나만 오가는 단순한 협상에서 이뤄졌습니다. 근무 형태, 기간, 평가 방식까지 여러 조건이 얽힌 협상이라면 첫 숫자 하나의 힘은 상대적으로 작아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표선은 근거가 있을 때만 힘을 가집니다. 업무량도, 비교할 사례도 없이 높은 숫자만 부르면 상대는 그것을 기준점이 아니라 무리한 요구로 받아들입니다. 바닥을 가리는 이유는 더 높이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계산한 숫자에서 출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닥은 떠날 때 쓰는 선이고, 첫 마디는 원하는 곳에서 꺼내는 말입니다. 두 선을 섞는 순간 숫자는 바닥에 묶입니다.
이제 숫자를 세울 순서는 정리됐습니다. 그런데 목표선을 종이에 다 적어놓고도, 막상 상대 앞에 앉으면 심장이 빨라지고 준비한 숫자 대신 "괜찮습니다"가 먼저 튀어나온다면, 그때는 무엇부터 다뤄야 할까요?
참고 자료
- Schaerer, M., Swaab, R. I., and Galinsky, A. D. (2015). Anchors weigh more than power: Why absolute powerlessness liberates negotiators to achieve better outcomes. Psychological Science — 원문 정보
- Program on Negotiation, "Business Negotiation Solutions: Coping with Low Power" (위 연구의 목표 가격 집중 실험과 단일 쟁점 한계 소개) — 원문 보기
- Tversky, A., and Kahneman, D. (1974). 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 Science, 185(4157), 1124–1131 — PubMed
- Roger Fisher, William Ury, Bruce Patton, 『Getting to Yes』, Penguin (1981년 초판, 1991년 개정판)